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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원길 「착한 스토커」

by 답설재 2025. 2. 13.

 

 

 

저녁 내내 안동 사는 김원길 시인의 시집 《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지내는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년에 자주 가는 식당 종업원으로부터 시 한 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던가 해서 "내가 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한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더러 노망이 나서 분명한 신변잡기를 행만 나누어 시라고 발표해서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늘그막에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경우로 김 시인도 그런 경우인가 기대를 갖고 있다.

 

시집 《덤》에는 인류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시도 나오고, 고사(故事)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도 여러 편이고, 김 시인 특유의 서정시들도 많은데 나더러 고르라면 '마음에 드는 대로'(제일 재미있는 대로) 혹은 "이런 시 더 보고싶어요" 하고 싶은 마음에서 다음 두 편을 선택할 것 같았다.

 

 

착한 스토커

 

 

나는 위험한 짐승

스스로를 가두어야 했다.

 

내가 나서면 그녀는

깊이 숨거나 멀리 달아나야 하니까.

 

그녀는 내가 잊지 못할까 봐

항상 걱정일 것이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꼭꼭 가두어 버렸다.

 

그녀의 불행은 나의 불행

그녀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니까.

 

고독과 향수는

참으면 될 테니까.

 

 

그랬었구나

 

 

우리 절대 만나질랑 말아요.

아주 쎈 자석처럼 바로 붙겠죠.

그러고는 감당 못해 후회하겠죠.

 

그러니 카톡이나 주고받아요.

젊을 적 사진 있음 보여 주구요.

그러다가 오랫동안 소식 없으면

이젠 핸폰도 못 쓰나 생각하겠죠.

 

그러다가 알겠죠, 어쩜 모를 거예요.

나는 당신이, 당신은 내가

오래전 이 세상 떠났다는 것을,

 

그랬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그때서야 아, 그랬었구나!

하게 되겠죠.

 

 

왜 하필 이런 시인가, 하면 김원길 시인의 작품에는 특유의 연모의 정 같은 것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이 내내 기억 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편만 보여봐, 하면 어떤 작품을 고를까... 한 편이라니... 정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굳이

어느 새벽꿈 속에서나마

나 만난 듯하다는

그대,

 

내 열 번 전생의

어느 가을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角干) 유신(庾信)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참 그날

쪽같이 푸르던

하늘빛이라니.

 

 

(1993《들꽃다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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