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내내 안동 사는 김원길 시인의 시집 《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네 살 연상으로 두고두고 그리워하며 지내는데,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을까, 기다리는 재미도 있다.
어느 시인이 말년에 자주 가는 식당 종업원으로부터 시 한 편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던가 해서 "내가 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는 내용의 시를 써서 발표한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지면 더러 노망이 나서 분명한 신변잡기를 행만 나누어 시라고 발표해서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김춘수 시인은 늘그막에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한 경우로 김 시인도 그런 경우인가 기대를 갖고 있다.
시집 《덤》에는 인류에게 실망을 주는 정치가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시도 나오고, 고사(故事)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도 여러 편이고, 김 시인 특유의 서정시들도 많은데 나더러 고르라면 '마음에 드는 대로'(제일 재미있는 대로) 혹은 "이런 시 더 보고싶어요" 하고 싶은 마음에서 다음 두 편을 선택할 것 같았다.
착한 스토커
나는 위험한 짐승
스스로를 가두어야 했다.
내가 나서면 그녀는
깊이 숨거나 멀리 달아나야 하니까.
그녀는 내가 잊지 못할까 봐
항상 걱정일 것이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꼭꼭 가두어 버렸다.
그녀의 불행은 나의 불행
그녀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니까.
고독과 향수는
참으면 될 테니까.
그랬었구나
우리 절대 만나질랑 말아요.
아주 쎈 자석처럼 바로 붙겠죠.
그러고는 감당 못해 후회하겠죠.
그러니 카톡이나 주고받아요.
젊을 적 사진 있음 보여 주구요.
그러다가 오랫동안 소식 없으면
이젠 핸폰도 못 쓰나 생각하겠죠.
그러다가 알겠죠, 어쩜 모를 거예요.
나는 당신이, 당신은 내가
오래전 이 세상 떠났다는 것을,
그랬었구나!
아, 그랬었구나!
그때서야 아, 그랬었구나!
하게 되겠죠.
왜 하필 이런 시인가, 하면 김원길 시인의 작품에는 특유의 연모의 정 같은 것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이 내내 기억 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편만 보여봐, 하면 어떤 작품을 고를까... 한 편이라니... 정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취운정(翠雲亭) 마담에게
굳이
어느 새벽꿈 속에서나마
나 만난 듯하다는
그대,
내 열 번 전생의
어느 가을볕 잔잔한 한나절을
각간(角干) 유신(庾信)의 집 마당귀에
엎드려 여물 씹는 소였을 적에
등허리에
살짝
앉았다 떠난
까치였기나 하오.
참 그날
쪽같이 푸르던
하늘빛이라니.
(1993《들꽃다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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