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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현대문학34

김연덕 「브로치」 브로치  김연덕  집안의 여자 어른이 갖고 있던 장신구의 이미지를 따라 살게 되는 삶은 얼마나 따뜻하고 끔찍한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안방의 직각 거울할머니는 마음 한쪽을 깊이빼앗긴 책을 읽는 것처럼그 책을 아기로 다루는 것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곤 했고 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 그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그릇그릇 안의 크고 작은 브로치들이었다 여러 색의 원석이 도금된 세찬 형태의 브로치들은 꼭 그릇 안에서 잠든 곤충처럼 보였지할머니는 외출 때를 제외하고 내성적인 그 곤충들을 잘 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에 브로치들도 종종 자기들만의 빛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 2024. 6. 13.
이서수(소설) 「몸과 비밀들」 이서수 「몸과 비밀들」《현대문학》2024년 6월호      처음엔 요영의 말이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요영의 집에 초대받아 내밀한 고백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지요. 요영은 성별을 구별하는 태도에 큰 반발심을 갖고 있었어요.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상당히 불편하겠다고 대꾸했지만, 샤워를 마치고 돌아와 요영의 곁에 누웠을 땐 성별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면 종류를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거라고 상상했지요. 제 말에 요영은 고개를 저었습니다.옷이 없는 상황에 더 가까워. 모두가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어떤 종류의.. 2024. 6. 13.
안중경 「노랑」 노랑  안중경  너에게 노랑을 준다.햇빛에 부서지는 생강나무 꽃그 노랑을 준다.어린 시절을 겹겹이 덮고 있는 모과의노랑을 준다.혀 위에서 가루로 녹아 흐르는 삶은 달걀의노랑을 준다.코 옆에서 입술 아래로 접혀 있던 창백한노랑을 너에게 돌려준다.매일 밤 나를 바라보던 달의 눈동자그 노랑을 준다.잠자리 꼬리에서 흘러내리던 동그란 알갱이의노랑을 준다.소나기가 그치고 난 후 하늘에 번졌던노랑을 준다.지붕의 테두리를 반듯하게 금 긋던그 노랑을 준다.흰 밥알 사이로 스며들던 시금치 된장국의그 노랑을 준다.삼각형으로 조각나던 어린 새의 울음소리그 노랑을 준다.너에게 노랑을 준다.   ............................................안중경  1972년 춘천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 .. 2024. 6. 7.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김연덕  산속에 묻혀 있던 우리 집에서 언니는 한밤중에도 비이올린을 켜곤 했다 언니 방 방문에는 검은색 니트를 입은 카라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언니가 활을 꺼내 송진을 문지를 때마다 그 지휘자 옆으로 사라져버릴까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흑백의 세계로 언니가 사랑하는 외국으로 빨려 들어갈까 무서웠다 언니 방 바깥으로는 창문과 너무 가까이 뻗어 자란 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높은음을 켤 때마다 잔가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기진한 채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할 것처럼 조금씩만 떨리곤 했다 가지 몇 개가 어둡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어린 나는 활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거칠고 고집스러운 흑백의 사랑을 느꼈다 비가 오.. 2024. 5. 15.
오은경 「매듭」 매듭 오은경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갔는데 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가 돌아갑니다 파출소를 지나면 공원이 보이고 어제는 없던 풍선 몇 개가 떠 있습니다 사이에는 하늘이 매듭을 지어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풍경 속을 가로지르는 새 떼처럼 먹고 잠들고 일어나 먼저 창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습관인데 볕이 내리쬐는 나는 무엇을 위해 눈을 감고 있던 걸까요? 낯선 풍경을 익숙하다고 느꼈던 나는 길을 잃습니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건물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구름이 변화를 거듭합니다 창문에 비친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나는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당신보다 나는 먼저 도착합니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당신에게 나는 돌아와 있습니다. .. 2024. 4. 22.
자연에 대한 경외심 '나'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이우환 화백이고 '루트'와 '에스라'는 그의 친구들이다. 루트가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인이었던 걸까?" 나는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그럴 리는 없지. 다만 지금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금 더 자연의 에너지, 그 힘과 연이어 있는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해." "자연의 힘?" "우리처럼 고립된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이어진 공동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신에 대한 신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에스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괴력이 작용했다는 뜻이군." "현대인은 공통된 정보와는 연결되어 있지만, 생각도 신체도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의 힘밖에 없는 게지." "엄청난 힘을 잃고 말았네." 이우환의 에세이 「라.. 2024. 4. 18.
장석남 「사막」 사막 장석남 1 나를 가져 내 모래바람마저 가져 나를 가져 펼친 밤하늘 전갈의 숲 사막인 나를 가져 목마른 노래 내 마른 꽃다발을 가져 2 내가 사막이 되는 동안 사막만 한 눈으로 나를 봐 너의 노래로 귀가 삭아가는 동안 바람의 음정을 알려줘 내가 너를 갖는 동안 모래 능선으로 웃어줘 둘은 모래를 움켜서 먹고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노래로 눕는 거야 나는 너를 가져 사막이 될 거야 나는 너를 가져 바람 소리가 될 거야 ..................................... 장석남 1965년 인천 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뺨에 서.. 2024. 4. 11.
황모과 《언더 더 독》 황모과 《언더 더 독》 《현대문학》 2024년 3월호 돈이 많으면 곧 모든 일을 AI들에게 시키며 살아가는 세상이 되겠지? 그런 세상에서도 더러 개(독)만도 못한 생활(언더 더 독)을 할 수도 있겠지? 돈으로 DNA를 편집해서, 그러니까 유전자를 조작(편집 혹은 시술)해서 머리가 최고로 좋게 하고, 온갖 험악한 바이러스를 다 물리치게 하고, 힘들여 운동을 하지 않아도 근육이 울퉁불퉁한 인간이 되게 하고, 인물이 훤한 인간이 되게 하고 심지어 지성과 인품마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겠지? 과학자들은 지금 그런 걸 연구하고 있겠지? 유발 하라리("사피엔스")에 의하면 2050년경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게 가능해진다고 했지? '죽지 않는 인간' '신인류' '신과 같은 인간'이 된다고... 그럼 그게 정말 '인간.. 2024. 4. 3.
심보선 「새」 새 / 심 보 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 2024. 3. 20.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전문)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김 현 지상의 강아지 한 마리가 없어진다 때론 명백한 사실이 시적이지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아침 일찍 산책 나오던 한 사람이 사라진다 그는 아직 누워 있다 텅 빈 그를 깨우기 위해 누구도 상냥하게 짖지 않고 침대로 폴짝 뛰어오르지 않기에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일을 (짖어봐!) 사람이 해주지 않아서 (뛰어올라봐!) 사람은 다른 동물에게 바란다 오늘 사람이 잊은 일을 (사랑해주세요.)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꿈의 골목에 강아지가 나타난다 쓰다듬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그의 베개는 젖고 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난다 천국이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그는 우는 얼굴로 기뻐하며 눈을 뜬다 알면.. 2024. 3. 10.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꿈의 골목에 강아지가 나타난다 쓰다듬을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그의 베개는 젖고 있다 - 김현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부분) 그렇게 해서 영영 헤어진 사람을 생각해본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더 보자고 하면? 보여주고 싶다. 이렇게 이어진다면서.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겨난다 천국이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또 울겠지? "너와 내가 함께 갔던 곳" "함께 갔던 곳"... 하며 울겠지? 울지 말고 들어보라고 해야겠지? 그는 우는 얼굴로 기뻐하며 눈을 뜬다 알면서도 새로운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부르던 이름을 속삭인다 강아지 한 마리가 천국에 가면 천국의 우울한 사람이 웃게 된다 고양이 한.. 2024. 3. 6.
임선우(단편) 「프랑스식 냄비 요리」 임선우(소설) 「프랑스식 냄비 요리」 『현대문학』2024년 2월호 놀라운 이야기꾼을 발견했다. 한때는 단이 내 곁에서 먼저 잠들어버리면, 단의 잠 속으로 따라 들어가고 싶었다. 눈을 감으면 드러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단의 꿈에 잠입하고 싶었다. 단의 무의식 속 풍경을 훔쳐보고, 그 안에서 하룻밤을 꼬박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이면 단을 더욱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눈을 뜨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이 된 단은, 호텔 베이커리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나'의 첫 연인이었고 6년을 함께했는데 그 단이 어느 날 수영장 물에 흐물흐물 녹아버렸다. 단이 눈앞에서 녹아내렸을 때는 왜?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왜 지금 이 시점에 녹아버린 건데? 수영장 한 달 이용권을.. 2024.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