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현대문학30

직박구리에게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 존재조차 몰랐었어. 관심이 없었던 거지.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부터 꽥꽥 쫵쫵 악착같이 떠들어대는 녀석들, '행동대장'이 꽥꽥거리며 지휘하는 대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달콤한 열매가 달린 나무를 점령하는 것들, 익은 열매를 거들낸 다음엔 익지 않은 것조차 감미만 돌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들, 방조망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라도 실컷 따먹고는 나오지를 못해 푸드덕거리다가 꺼내주면 고마워하지도 않고 달아나는 것들, 꺼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죽어버리고 날개와 깃털, 해골만 남기는 것들, 이쪽저쪽으로 휙 휙 바람을 일으키며 위협 비상을 하는 것들, 이(李) 상무는 산까치로 부르지만 뭘로 봐도 직박구리가 분명한 것들,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겠지.. 2023. 8. 17.
임승유 「세 사람」 세 사람 임승유 그녀는 모호를 알았고 모호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그 모호다. 그녀는 모호가 모자 캡 들어 올리는 방법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한번은 어떻게 들어 올리는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더 해보라고 했을 때 모호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몰랐고 그냥 구운 은행을 집어 먹는 수밖에. 모호가 시를 도대체 어떻게 완성하는 겁니까 물어봐서 글쎄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데려오는 것 같아요 말했다가 우와 문장이 문장을 데려온대 그렇지 멜로디가 다음 멜로디를 데려오는 거지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이후로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모호와 내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모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무의식중에 모자 캡을 들어 올렸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 2023. 8. 16.
사이먼 후지와라 씨에게 후지와라 씨! 이번달 《현대문학》표지에서 후지와라 씨의 작품을 봤습니다. 피카소 그림은 아니고, 아니라 하기도 그렇고, 이건 희한한 패러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한번 장난을 하자는 것이었을까? 그럴 리 없는데...' 미안합니다. 이 월간지는 우리나라 굴지의 월간 문학지여서 표지 그림을 그리 가볍게 선정할 리가 없거든요. 잘은 몰라도 창간호부터 지난달 823호까지의 표지 구성을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거든요. 그래, 그렇긴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겠지... 하고 책을 읽어가며 군데군데 들어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상하지, 지금까지 이 월간지에서 본 다른 표지화 작가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보다 눈길이 오래 머물곤 했습니다. 작품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주면.. 2023. 8. 13.
이희형 「플랫폼」 플랫폼 이희형 나는 우산을 들고 승강장에 서 있습니다 오늘 저녁엔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곳엔 비가 오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눈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검정 장우산을 썼습니다 그게 어른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쌓이는 눈을 지켜보다가 전광판에 양쪽 열차가 모두 지연되고 있다는 알림이 뜬 것을 보았습니다 귓가에서 빗소리가 터지고 있습니다 반대편 승강장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갑과 목도리를 끼고 모두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 먼 곳에서 다가오는 열차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내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가오는 열차가 어느새 승강장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열차에 오릅니다 정해진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열차가 사라지.. 2023. 7. 23.
이설야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이설야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트라파니 소금이 바람과 함께 도착했다. 시칠리아 염전의 염부들 혈관엔 붉은 피 대신 소금이 흐른다지. 근해에 나갔던 시칠리아 염부들 혈관엔 물고기들이 헤엄쳐 온 푸른 파도와 흰 포말이 켜켜이 피어오르겠지. 조개무덤에서 나온 패각 조각이 산산조각 난 채 수억 년 빛나던 해파리들의 춤을 추겠지. 혓바닥을 감은 미역귀들의 노래, 천천히 듣다 사라져 간 시간들도 함께 흐르겠지. 토마토와 양파를 기르는 농부들 혈관에는 붉은 흙에 떨어지던 땀방울, 바람에 씻기던 땀방울이 소금 되어 흐르겠지. 검은 후춧가루와 흰 후춧가루가 흐를지도 몰라. 노을처럼 번지는 슬픔의 가루들로 식탁은 튼튼한 다리들을 키우겠지. 원형극장을 짓기 위해 바위를 깎고 돌을 나르고 동굴을 파던 .. 2023. 6. 6.
강화길 「풀업」 강화길(단편소설) 「풀업」 《현대문학》 2022년 11월호 굳이 세월이라 할 것도 없이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실감합니다. 사랑과 연대로만 이야기해야 옳던 가족 이데올로기조차 해체되고 엷어지고 있는 걸 모른 채(인정하기 싫은 채, 인정할 수가 없는 채) 살았습니다. 「풀업」이란 소설에서 두 군데를 옮겨 썼습니다. "미수야." 그간 지수는 이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미수 역시 조금 당황한 듯했다.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계속 엄마 집에 얹혀살았으면 좋겠니? 아니면 독립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니?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왜 그래?" "있잖아 미수야." 아주 오랫.. 2023. 5. 24.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 여름 그들은 육지 끝에 당도해 한낮에 배추씨를 심고 밤이 내리면 해변에 나가 큰 소리로 시집을 읽을 것이다. 그들이 고른 시집은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이나 김영미의 『맑고 높은 나의 이마』일 것이다. 앤 섹스턴이나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은 고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시인들의 시부터 읽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미즈노 루리코와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시집을 육지 끝까지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여성 시인들의 시를 몹시 사랑하고, 특히 한 시인의 시집 제목은 무려 '끝의 시'이며 또 다른 시인의 시집에는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실려 있는데도.. 2023. 5. 19.
히라노 게이치로 《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平野啓一郞 《본심》 양윤옥 옮김, 현대문학 2023년 2월호 "어머님의 VF(virtual figure)를 제작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VF에 관해서는 대략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일반적인 상식 정도밖에는......" "가상공간 안에 인간을 만드는 것이에요. 모델이 있는 경우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인 경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시카와 시쿠야 씨의 경우에는 모델이 있는 쪽을 의뢰해 주셨네요. 겉모습은 실제 사람과 전혀 구별이 안 될 정도예요. 이를테면 저의 VF와 저 자신이 가상공간에서 이시카와 씨를 만나더라도 어느 쪽이 실물인지 분명 구별을 못 하실 거예요." "그렇게까지 똑같아요?" "이따가 보여드리겠지만 그 점에 관해서는 믿어주셔도 좋습니다. 말을 건네면 아주 자연스.. 2023. 3. 13.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현대문학 2013 연필, 먹, 펜 그림과 에세이 50여 편을 엮은 책이다. 그림 에세이집? 무심코 보는 사물로써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쉰 가지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렇다고 이제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세상을 엿보는 것이 좋았다. 월간《현대문학》에 연재된 작품들이다. 이미 본봤는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읽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겠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책' 코너에 놓아둘 것이다. 어린 시절 창가에서 나는 또래들보다 한 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느라로 부모님은 호적을 고쳐 내 생일을 일곱 달이나 앞당겼다. 늦게 본 자식을 빨리 키워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 덕에 나는 나보다 .. 2023. 3. 1.
유희경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유희경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 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파가 교란될 때 들리는 소리. 예민해진 탓이야, 중얼거리고 k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k는 책을 내려놓고 꼼꼼하게 책상 위 모든 물건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무언가 있어 여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k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무언가 들어간 게 아닐까. 책장을 털어보고 냄새도 보다가 마침내 48쪽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비어 .. 2022. 12. 17.
사랑 그 열정의 덧없음 :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현명한 선택」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The Sensible Thing" 허창수 옮김, 《현대문학》 2022년 12월호 조지는 잔퀼이 보고 싶어서 보험회사에서 해고당한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여기고 잔퀼에게로 달려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언제나 마음 같진 않다. 다른 사내들이 케리를 집적거리는 걸 보게 되고 날씨조차 덥다. "많이 덥네요. 선풍기 좀 틀어야겠어요." 선풍기를 조절해놓고 난 뒤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그는 예민해진 분위기를 피하지 못한 채 숨기려 했던 구체적인 얘기를 불쑥 꺼내고 말았다. "언제쯤 저와 결혼할 생각입니까?" "저랑 결혼할 준비는 다 되셨나요" 갑자기 그는 화가 치밀어 올라 퉁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빌어먹을 .. 2022. 12. 16.
이영주「구름 깃털 베개」 구름 깃털 베개 ​ ​ 이 영 주 ​ ​ 부드러운 광기로 가득 차 있어. 깃털 같은 광기. 아버지는 한동안 베개를 만들었는데 하얀 솜이 아버지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에 깃털이 돋았지. 아버지, 인공 구름을 끌고 온 자. 인공 구름으로 가득한 베개를 베고 잠이 든다는 것. 나는 가끔 공중에 떠 있는 관에서 잠들었고 깨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내 머리맡에 흩어진 구름 조각을 세탁기에 돌렸지. 실패한 조각은 표백을 해야 한다. 나는 세탁기 통에서 돌돌돌 깃털이 돌아가는 표백인. 아버지는 듬성듬성한 내 깃털 밑에서 죽음을 연습하지. 지난 일주일 동안 죽었다고 하지. 부드러운 광기가 베개 안에 스며들고, 나는 남은 깃털이 모두 빠졌지. 깃털은 역시 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드러운 소재로 광기를 꾸며야 한다. 나는 .. 2022.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