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유희경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
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파가 교란될 때 들리는 소리.
예민해진 탓이야,
중얼거리고 k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k는 책을 내려놓고 꼼꼼하게
책상 위 모든 물건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무언가 있어 여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k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무언가 들어간 게 아닐까.
책장을 털어보고 냄새도 보다가 마침내
48쪽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비어 있는.
이상하네. 여기가 왜 비어 있을까.
k는 81쪽을 읽고 있었고 48쪽은
이미 읽고 지나왔으니 몰랐을 리 없다.
47쪽은 "나"라는 주어에서 끝이 났고
49쪽은 "했었다."라는 종결형 동사로 시작했고
나와 했었다의 사이 여백에서
깊고 광활하고 아찔하며 아득한 사이에서
소리가, 단파와 단파가 섞일 때
교묘하고 날렵한 소음이.
k는 책을 덮었다. 창문을 열었고
찬 밤바람을 들이마셨다. 다시 창문을 닫고,
책을 펴보았다. 48쪽은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곳에서 소리가 난다. k는
그 페이지에 바짝 귀를 대어보았다.
소리는 보다 분명해졌고 그 소리로부터
k는 어떤 의미도 해석해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k는
집요하게 귀를 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어떤 대화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누가 누구에게 대답을 하는
의미는 알 수 없고 다만 정답구나,
k는 어떤 풍경을 생각했다.
잊고 있었던 어느 봄날의 정겨움.
잔디로 덮인 언덕과 그곳을 오르내리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 같은 정겨움.
그것은 돌아오지 않아 슬프고
돌이킬 수 없어 아름답지.
기억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
그러자 그 모든 상황이 이상하지 않고
이상한 일이다. k는 81쪽을 펼쳤고
거기 적혀 있는 대수롭지 않은 내용들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소리가 여전했으나
k는 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그 책은 어디 있어. 나는 k에게 물었다.
나도 그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지.
하지만 k는 잃어버렸어. 대답할 뿐이다.
나는 k가 얌치가 없는 사람인 걸 알고 있다.
그 소리를 들어볼 기회 따윈 없겠지.
하기에 내게는 그런 봄이 정겨움이나,
오르내릴 잔디 덮인 언덕의 기억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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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장호연 옮김, 마터, 2012,69쪽. 오페라, 「카피라치오─음악을 위한 대화」중 백작 부인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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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다음 봄에 우리는』. <현대문학상> 등 수상.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런 장면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냅니다.
그 장면에 이야기가 붙여지고 그렇게 붙여지면 저 시인의 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장면 하나가 그려져 그 속에 머물다가 돌아옵니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 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현대문학』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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