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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언희 「삭제하시겠습니까?」

by 답설재 2022. 12. 8.

 

 

 

 

삭제하시겠습니까?

 

 

김언희

 

 

......쪄 죽일 듯이 더운 날이었어, 언니, 피팔나무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어, 담장 위에서 힐끔힐끔 따라 걷던 원숭이가 일순 내 눈길을 낚아챘어, 언니, 적갈색 눈알로 나를 훑었어, 훑으면서 벗겼어, 나를, 바나나를 벗기듯이, 나는, 정수리부터 벗겨졌어, 언니, 활씬 벗겨졌어, 뼛속까지 벗겨졌어, 놈은, 수음을 하기 시작했어, 내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보란 듯이 나를, 따먹기 시작했어, 언니, 숨이 헉, 막히는 대낮에, 광장 한복판에, 나, 홀로 알몸이었어,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알몸이었어, 언니, 담벼락 그늘에 죽치고 앉았던 사내들이 누렇게 이빨들을 드러내며 웃었어, 눈 속의 원숭이 똥구멍, 졸밋거리는 똥구멍들을 감추지 않았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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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1953년 진주 출생. 198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트렁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뜻밖의 대답』 『요즘 우울하십니까?』 『보고 싶은 오빠』 『GG』.

 

 

『현대문학』2022년 11월호.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가능하다면요."("삭제해주실 수 있다면요.")

"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