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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유희경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by 답설재 2022. 12. 17.

이야기

"이렇게 섬세한 짜임새를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 수 있으랴."*

 

 

유희경

 

 

대수롭지 않은 책을 읽던 k는

문득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파가 교란될 때 들리는 소리.

예민해진 탓이야,

중얼거리고 k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글자도 나아갈 수 없었다.

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k는 책을 내려놓고 꼼꼼하게

책상 위 모든 물건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무언가 있어 여기.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는

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k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책 속에 무언가 들어간 게 아닐까.

책장을 털어보고 냄새도 보다가 마침내

48쪽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글자 하나 없이 비어 있는.

이상하네. 여기가 왜 비어 있을까.

k는 81쪽을 읽고 있었고 48쪽은

이미 읽고 지나왔으니 몰랐을 리 없다.

 

47쪽은 "나"라는 주어에서 끝이 났고

49쪽은 "했었다."라는 종결형 동사로 시작했고

나와 했었다의 사이 여백에서

깊고 광활하고 아찔하며 아득한 사이에서

소리가, 단파와 단파가 섞일 때

교묘하고 날렵한 소음이.

k는 책을 덮었다. 창문을 열었고

찬 밤바람을 들이마셨다. 다시 창문을 닫고,

책을 펴보았다. 48쪽은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곳에서 소리가 난다. k는

그 페이지에 바짝 귀를 대어보았다.

소리는 보다 분명해졌고 그 소리로부터

k는 어떤 의미도 해석해낼 수 없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k는

집요하게 귀를 대고 있었는데,

그 소리는 어떤 대화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누가 누구에게 대답을 하는

의미는 알 수 없고 다만 정답구나,

k는 어떤 풍경을 생각했다.

잊고 있었던 어느 봄날의 정겨움.

잔디로 덮인 언덕과 그곳을 오르내리며

뛰어놀던 어린 시절 같은 정겨움.

그것은 돌아오지 않아 슬프고

돌이킬 수 없어 아름답지.

기억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어.

그러자 그 모든 상황이 이상하지 않고

이상한 일이다. k는 81쪽을 펼쳤고

거기 적혀 있는 대수롭지 않은 내용들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소리가 여전했으나

k는 참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그 책은 어디 있어. 나는 k에게 물었다.

나도 그 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지.

하지만 k는 잃어버렸어. 대답할 뿐이다.

나는 k가 얌치가 없는 사람인 걸 알고 있다.

그 소리를 들어볼 기회 따윈 없겠지.

하기에 내게는 그런 봄이 정겨움이나,

오르내릴 잔디 덮인 언덕의 기억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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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장호연 옮김, 마터, 2012,69쪽. 오페라, 「카피라치오─음악을 위한 대화」중 백작 부인의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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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 1980년 서울 출생. 2008년 『조선일보』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이다음 봄에 우리는』. <현대문학상> 등 수상.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런 장면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냅니다.

그 장면에 이야기가 붙여지고 그렇게 붙여지면 저 시인의 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장면 하나가 그려져 그 속에 머물다가 돌아옵니다.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 또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현대문학』2022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