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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신율리 「달팽이의 비문증」

by 답설재 2022. 12. 2.

달팽이의 비문증

 

 

이신율리

 

 

나비가 바다를 끄는 암초 숲을 지나고 있어

 

동공에 쌓은 오래된 질문, 왼돌이 달팽이의 등은 바람을 만들지도 몰라

 

이마를 짚어주는 더듬이

달팽이가 밟으면 가장 얇은 소리가 난다는 길을 비켜가지

 

길이 생겨나고 있어 물방울 계단을 허물지 않고서도

구름처럼 입 꾹 다물고 맨살을 내어줄 수 있는 이유

 

주근깨 돋는 한낮은 안개꽃 천지야

동공 속 이야기를 지고 두더지는 파밭을 언제 다 지나가나

 

눈 뜨고 자는 밤엔 이 밤부터 내일까지 비가 올지도 몰라

크고 둥근 뼈를 그려보거나 처음 들었던 빗방울 소리를 떠올리면 뿔이 쑤욱 자라서

 

느리게 넘기는 페이지는 왜 그렇게 질문이 많은지

살만한 이유에 물기 돌면 풋살구 같은 신 벗고 바다를 향해 꿈쩍꿈쩍 나아가지

물결처럼 팽이를 감고 질문인 것처럼 문을 열고

감았던 눈을 떴어 눈 속으로 바다, 젖은 날개를 털고 날아가는 나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문장웹진』 2022년 8월호

 

 

 

 

 

 

이신율리 시인이 보고 있는 세상은 지금 이 세상이다.

그 시인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그 시인과 나는 같은 세상을 다르게 살아간다.

나는 이곳을 떠나 그 시인의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다.

시인을 따라 들어가고 싶은 세상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그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만 잠깐 그 세상을 들여다보고 동경하다가 돌아온다.

시란 그런 것인 것 같다.

도저히 들어갈 수는 없는 시인의 세상......

 

 

P.S.

사람들은 음악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제각기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거나 싫어하는 음악에 대한 언급은 드러내놓고는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음악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다른 음악에 대해 그만큼씩 관대해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음악과 미술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지만
사람들은 미술에 대해서도 관대하다.
이해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해서도 그 작품성을 부정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건 자신의 미흡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작품에 대해 결례를 범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다.
한 번 읽어보고 당장 신문기사처럼 해석되어야,
말하자면 자신이 파악한 그 문장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동일한)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인식되어야
제대로 된 시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령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고 분통을 터뜨리거나 짜증을 내기도 한다.

무슨 말인지 설명 좀 해보라고도 한다.
그래서 국어 시험 출제자들은 시의 의미 해석에 관한 문항을 마음 놓고 출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나는, 주제넘을지 몰라도, 시는 음악이나 미술보다 얼마나 더 주관적인 느낌을 가지게 하는 예술인가를 생각한다.
그 생각을 하기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시는 국어시험문제로 출제될 수 있고 출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해온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에 속았기 때문이다.
늦게라도 그것이 잘못된 관념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칫하면 한평생 중학생 수준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신문기사처럼 시를 읽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뻔했다.
아, 얼마나 서글픈 일이겠는가.

나는 이신율리 시인의 시를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왜 남에게 저 시인의 시를 설명해야 하는가.

내가 어떻게 저 시인의 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저 시인의 시를 나에게만 설명하고 싶어 한다.
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의 그 세상을 알고 싶어 하게 된다.
어느 화가의 그림 앞에 서 있을 때처럼...
순간, 하던 일을 멈추게 되는 음악을 들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