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청색종이 2022
뛰어
옥수수를 갉아 먹다 물린 고라니가 절뚝이며 뛰어
그 뒤를 금동이가 컹컹컹 쫓으며 뛰어
나리가 금동아 이제 그만해 소리치며 뛰어
고라니가 강을 가로질러 뛰어
그 뒤를 소나기가 작고 하얀 발로 토도독 뛰어
금동이가 멈칫하더니 나리를 향해 뛰어
나리와 금동이가 집으로 뛰어
고라니가 휙, 돌아보더니 산의 품으로 뛰어
휴, 내 심장이 가만 있지 못하고 콩닥콩닥 뛰어
조영수의 동시는 소설 같다. 재미있다.
동시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
흔히 소설 속에서는 발견되는 그 진실이 진짜 세상에서는 너무 귀해서 조영수의 동시에서 그 진실을 보는 순간을 즐거워하며 읽는다.
시인에겐 시적 순간일까?
조영수의 동시 속에는 그런 순간들이 꼭꼭 들어 있다.
숨구멍
교실 환경판에
미술 시간에 그린 나비를 붙입니다
먹그늘나비왕나비신선나비부처나비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배추흰나비오색나비거꾸로여덟팔나비유리창나비큰표범나비
공작나비노랑나비홍점알락나비파랑나비산제비나비모시나비
꼬리명주나비뱀눈그늘나비푸른큰수리팔랑나비사향제비나비
봄처녀나비왕팔랑나비갈구리나비그리고이름모를나비나비들
- 숨구멍이 없네
자연이가 환경판 밖으로
나비 몇 마리 옮깁니다
보미도 노랑나비를 떼어 옮깁니다
하늘이도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를 떼어 옮깁니다
나비가 숨을 쉬는 것 같습니다
저런 온갖 나비가 있다는 사실, 그런 나비들에게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 시적 순간, 그런 진실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조영수의 시가 그래서 좋다.
조영수의 이런 시들은 체험 없이는 쓸 수 없는 시일 것이다.
아이들의 동시는 파릇파릇하다.
그 파릇파릇함을 흉내 내는 건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도 왜 동시작가들은 그런 시를 쓰려고들 할까?
나는 아이들 흉내를 내지 않는 조영수의 시가 앞으로는 또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그의 동시가 우리 시의 새로운 경지를 마련해 갈 것 같다는 비전문가로서의 예측도 해보곤 한다.
틀린 답이 지어준 별명
(문) 종이 위에 철가루를 뿌리고 그 아래
자석을 움직이면 철가루는 어떻게 될까요?
(답) 고슴도치가 털을 세우고 소풍 가는 것처럼 움직인다.
과학 시험지의
틀린 답을 본 영대가 으하하하
고슴도치다!
그 후,
내 별명은
고슴도치가 되었다.
시인의 손자손녀가 그렸을 그림들도 시처럼 곱다.
자꾸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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