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by 답설재 2023. 2. 17.

조영수 동시집 《그래 그래서》

청색종이 2022

 

 

 

 

 

뛰어

 

 

옥수수를 갉아 먹다 물린 고라니가 절뚝이며 뛰어

 

그 뒤를 금동이가 컹컹컹 쫓으며 뛰어

 

나리가 금동아 이제 그만해 소리치며 뛰어

 

고라니가 강을 가로질러 뛰어

 

그 뒤를 소나기가 작고 하얀 발로 토도독 뛰어

 

금동이가 멈칫하더니 나리를 향해 뛰어

 

나리와 금동이가 집으로 뛰어

 

고라니가 휙, 돌아보더니 산의 품으로 뛰어

 

휴, 내 심장이 가만 있지 못하고 콩닥콩닥 뛰어

 

 

조영수의 동시는 소설 같다. 재미있다.

동시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

흔히 소설 속에서는 발견되는 그 진실이 진짜 세상에서는 너무 귀해서 조영수의 동시에서 그 진실을 보는 순간을 즐거워하며 읽는다.

 

시인에겐 시적 순간일까?

조영수의 동시 속에는 그런 순간들이 꼭꼭 들어 있다.

 

 

숨구멍

 

 

교실 환경판에

미술 시간에 그린 나비를 붙입니다

 

먹그늘나비왕나비신선나비부처나비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

배추흰나비오색나비거꾸로여덟팔나비유리창나비큰표범나비

공작나비노랑나비홍점알락나비파랑나비산제비나비모시나비

꼬리명주나비뱀눈그늘나비푸른큰수리팔랑나비사향제비나비

봄처녀나비왕팔랑나비갈구리나비그리고이름모를나비나비들

 

- 숨구멍이 없네

자연이가 환경판 밖으로

나비 몇 마리 옮깁니다

보미도 노랑나비를 떼어 옮깁니다

하늘이도 고운점박이푸른부전나비를 떼어 옮깁니다

 

나비가 숨을 쉬는 것 같습니다

 

 

저런 온갖 나비가 있다는 사실, 그런 나비들에게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 시적 순간, 그런 진실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조영수의 시가 그래서 좋다.

조영수의 이런 시들은 체험 없이는 쓸 수 없는 시일 것이다.

 

아이들의 동시는 파릇파릇하다.

그 파릇파릇함을 흉내 내는 건 부질없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도 왜 동시작가들은 그런 시를 쓰려고들 할까?

나는 아이들 흉내를 내지 않는 조영수의 시가 앞으로는 또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그의 동시가 우리 시의 새로운 경지를 마련해 갈 것 같다는 비전문가로서의 예측도 해보곤 한다.

 

 

틀린 답이 지어준 별명

 

 

(문) 종이 위에 철가루를 뿌리고 그 아래

        자석을 움직이면 철가루는 어떻게 될까요?

(답) 고슴도치가 털을 세우고 소풍 가는 것처럼 움직인다.

 

과학 시험지의

틀린 답을 본 영대가 으하하하

고슴도치다!

 

그 후,

내 별명은

고슴도치가 되었다.

 

 

 

시인의 손자손녀가 그렸을 그림들도 시처럼 곱다.

자꾸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