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설야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by 답설재 2023. 6. 6.

시칠리아, 소금이 왔다

 

 

이설야

 

 

소금이 왔다.

시칠리아 트라파니 소금이 바람과 함께 도착했다.

 

시칠리아 염전의 염부들 혈관엔 붉은 피 대신 소금이 흐른다지. 근해에 나갔던 시칠리아 염부들 혈관엔 물고기들이 헤엄쳐 온 푸른 파도와 흰 포말이 켜켜이 피어오르겠지. 조개무덤에서 나온 패각 조각이 산산조각 난 채 수억 년 빛나던 해파리들의 춤을 추겠지. 혓바닥을 감은 미역귀들의 노래, 천천히 듣다 사라져 간 시간들도 함께 흐르겠지.

 

토마토와 양파를 기르는 농부들 혈관에는 붉은 흙에 떨어지던 땀방울, 바람에 씻기던 땀방울이 소금 되어 흐르겠지. 검은 후춧가루와 흰 후춧가루가 흐를지도 몰라. 노을처럼 번지는 슬픔의 가루들로 식탁은 튼튼한 다리들을 키우겠지. 원형극장을 짓기 위해 바위를 깎고 돌을 나르고 동굴을 파던 광부들 혈관에는 까만 석탄가루와 헤드램프의 가느다란 빛 안에 고인 돌가루들이 흐르겠지.

 

흐느끼는 벌레들 빛 밖으로 도망치겠지. 남은 빛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의 희미한 노래

 

별들이 지나가는 하늘에 푸른 광맥이 흐르다 멈추기도 하겠지. 시칠리아 염전에선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장에도 소금이 흐르겠지. 눈동자마다 소금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흐르겠지. 소금 같은 눈송이들이 눈동자 속에서 다 녹아버리겠지. 다하지 못한 사랑이, 담을 수 없는 사랑이 별처럼 흘러 다니겠지. 넘쳐흐르겠지. 점심시간마다 철시하는 상인들 혈관엔 올리브나무의 바람이 흐르겠지.

 

상점의 마지막 불빛이 심장처럼 꺼지고 셔터가 내려가면 올리브나무 그림자도 점점 산을 내려오겠지. 내려오다 떨어진 열매들을 줍는 작은 손들을 보겠지. 연둣빛 열매는 너무 따스해서 슬프겠지. 그림자들은 강물처럼 점점 줄어들겠지.

 

소금이 왔다.

바람소금이 우편함에 도착했다.

 

 

 

..........................................................................

이설야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굴 소년들』『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빛난다"(후버트 드레이퍼스·숀 켈리).

그저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거의 내내 빛날 수도 있고, 처음 잠깐이거나 마지막 잠깐일 수도 있고, 어느새 지나가버린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긴 시간 내내 저 '소금'은 뚜렷하겠지?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두순 「친구에게」  (8) 2023.06.28
'기차는 8시에 떠나네'  (4) 2023.06.14
장정일 「하나뿐인 사람」  (2) 2023.05.31
조용우 「나의 슬픔 기쁨 절망의 시인」  (0) 2023.05.09
유미희 「강」  (0) 2023.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