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임승유 「세 사람」

by 답설재 2023. 8. 16.

세 사람

 

 

임승유

 

 

그녀는 모호를 알았고 모호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그 모호다.

 

그녀는 모호가 모자 캡 들어 올리는 방법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한번은 어떻게 들어 올리는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더 해보라고 했을 때 모호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몰랐고

 

그냥 구운 은행을 집어 먹는 수밖에. 모호가

 

시를 도대체 어떻게 완성하는 겁니까 물어봐서 글쎄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데려오는 것 같아요 말했다가 우와 문장이 문장을 데려온대 그렇지 멜로디가 다음 멜로디를 데려오는 거지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이후로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모호와 내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모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무의식중에 모자 캡을 들어 올렸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서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

임승유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2011년 『문학과사회』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그 밖의 어떤 것』『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현대문학』 2023년 8월호

 

 

 

 

 

 

L 시인에게

 

캡을 들어 올리는 모호, 그걸 해 보라고 주문하면 어벙하게 되는 모호가 떠오릅니다. 캡을 그렇게 할 수 있는 그건 그에게는 이해가 아니고 습관이거든요. 습관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이런 거야 하고 분해해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구운 은행이나 집어 먹을 수밖에요. ^^

문장이 다음 문장을 데려온다는 시인은 '와르르' 웃음을 불러왔네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냐?"

그렇지만 그건 L 시인도 그렇겠지요?

다음 문장을 데려오라고 어디에 조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데려오거나 말거나 할 수도 없고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고 난감하겠어요.

어떻게 기다리나요?

새벽이 오면 일어나 창밖을 살펴보고 아침 먹고는 혹 누가 전화로 알려주는지 귀를 기울이고 멍 때리고 앉아 있기가 그래서 책을 펼쳐서 읽으며 기다리고 혹 여기 어딘가 싶어서 찾고 그러다가 점심 먹고 오려나 하고 점심 먹고 또 기다리고 혹 텔레비전 화면 어느 구석에 힌트로 주어지나 싶어서 바라보다가 라디오도 듣다가 누가 만나자고 하면 어? 이 사람인가 싶어서 만나보고 그것도 아니네 싶으면 동네 앞길이나 냇물이 흐르는 곳, 산비탈 같은 곳으로 산책을 나가보고 그러다가 석양의 그 어디쯤 무슨 구름 모양으로 오나 살펴보기도 하고 어김없이 또 저녁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으면 오늘은 포기할까 하다가 읽은 책 속 어디서 본 듯하기도 해서 얼른 펴보고 밤 이슥하도록 기다리다가 꿈속으로 올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잠들고...

그렇게 하나요?

하루하루 그렇게 기다리며 살아간다면 시인은 땅을 파고 무거운 물건을 옮기고 땀을 뻘뻘 흘리고 그렇게 사는 건 아니라 해도 애써서 사는 건 마찬가지여서 아무나 시인을 하는 건 아닐 것 같네요.

우리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다음 문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사는 건 하기 싫고 할 수도 없지만 다음 문장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얽어매어서 만든 시는 읽기가 싫더라고요.

가짜 시여서 그럴까요?

사람들은 다 알아요. 멜로디가 다음 멜로디를 데려오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기다릴 수밖에요. 즐겁게 기다리세요. 모호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모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무의식 중에 모자 캡을 들어 올렸고 그걸 정말로 좋아하는 그녀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은 것처럼 놓치지나 마시고요 ~~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개미 「토끼 따위」  (23) 2023.10.11
이신율리 「국화 봉고프러포즈」  (8) 2023.10.05
이희형 「플랫폼」  (15) 2023.07.23
박두순 「친구에게」  (8) 2023.06.28
'기차는 8시에 떠나네'  (4) 202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