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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개미 「토끼 따위」

by 답설재 2023. 10. 11.

토끼 따위

 

 

김개미

 

 

어느 날 집에 가니 토끼가 있었다

아버지가 쳐놓은 철망 안에서

풀을 먹고 있었다

두 귀를 세우고 앉은 토끼는

빨간 눈알로 풀을 쏘아보며

쉬지 않고 풀을 먹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자리를 옮기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분명 책에서 만난 토끼는

달리기도 잘하고 늘어지게 낮잠도 자는

빠르고 태평한 강한 토끼였는데

우리 집 토끼는 너무 약해 보여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을 짓고 산대도

텃밭 앞에 토끼장 따위는

절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토끼를 기르면 토끼 때문에

언제가 되든 반드시 한 번은

토끼처럼 마음을 다치게 되니까

내가 동물을 기른다면

토끼보다 작고 토끼보다 영악한 동물을 기르고 싶었다

내게 속하는 것이 당하는 것보다

내가 당하는 게 나으니까

쉽게 죽고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하는 존재는

더 이상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

김개미  1971년 강원 인제 출생. 2005년 『시와반시』 등단. 시집 『앵무새 재우기』『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악마는어디서 게으름을 피우는가』『작은 신』.

 

 

 

『현대문학』 2023년 10월호.

 

 

 

 

 

 

'내게 속하는 것이 당하는 것보다 / 내가 당하는 게 나으니까 / 쉽게 죽고 무방비 상태로 공격당하는 존재는 / 더 이상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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