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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신율리 「국화 봉고프러포즈」

by 답설재 2023. 10. 5.

 

 

 

국화 봉고프러포즈

 

 

이신율리

마드리드 산히네스에서 추로스를 먹던 아침, 터키석 하늘에 태엽을 감았지 몇 바퀴를

돌렸으면 팝콘이 터졌을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까 끈적이는 생각에서 발을 빼면 어두워지는 한

강가야 오리 가던 길 되돌아오고 강물 소리 맞춰 봉고 돌아오고

트렁크를 활짝 열었어 풍선이 떠오르는 하늘이 넘쳐났지 그녀는 프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초코라테 셔터를 눌렀지 펄 립글로스 없이도 사진 잘 받겠다고 오늘 거울은 마음에 든다고

추로스를 먹던 아침 총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새를 보고 네가 웃었던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애드벌룬이 둥둥 떠올랐지 너는 커다란 프릴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제라늄 화분이 자꾸

시든다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앵두 등을 켰어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볼륨 높였지 노란 꽃송이가 불쑥불쑥

피어나 접근금지 구역이 사라지는 국화 불꽃놀이

호기심 많은 사수자리 꼬마 강가에서 장미정원까지 활을 당겼어 자두 맛 사탕을 깨물자

한꺼번에 오리 날아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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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세상』 2023년 가을호

 

 

 

산히네스의 아침에 추로스를 먹고 팝콘이 터질 태엽을 감고,

생각하다 바라보는 강물, 다시 곱고 예쁜 옷이 들어 있었을 트렁크를 열던 생각...... 크리스마스 앵두 등, 이어지는 젊음의 노래 여수 밤바다, 국화 불꽃놀이......

 

그런 생각으로 머리와 가슴을 채워야 하는 시인은 몇 살짜리 소녀일까?

다 팽개치고 살아 마침내 이 시를 썼겠지?

청소 하고 빨래 하고 수퍼 가고... 산히네스의 아침은 잊지 않았겠지?

잊고서야 어떻게 시를 쓰겠나.

 

나는 아직 가보지 않은 '산히네스의 아침'을 비로소 생각한다.

잠시만 다 팽개치고 그 아침을 생각한다.

시인이 온 생애를 바쳐 생각한 산히네스의 아침을 잠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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