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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by 답설재 2023. 5. 19.

이주혜(단편소설) 〈이소 중입니다〉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 여름 그들은 육지 끝에 당도해 한낮에 배추씨를 심고 밤이 내리면 해변에 나가 큰 소리로 시집을 읽을 것이다. 그들이 고른 시집은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이나 김영미의  『맑고 높은 나의 이마』일 것이다. 앤 섹스턴이나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은 고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시인들의 시부터 읽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미즈노 루리코와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시집을 육지 끝까지 가져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 여성 시인들의 시를 몹시 사랑하고, 특히 한 시인의 시집 제목은 무려 '끝의 시'이며 또 다른 시인의 시집에는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이 실려 있는데도, 그들은 오직 산 사람의 목소리로 채워진 시집을 고집스럽게 골라 육지 끝에 다다를 것이다. 낮에는 들판 가득 겨울을 대비하는 배추씨를 뿌리고 밤이면 겨울처럼 아득한 밤바다를 마주한 채 용감한 목소리로 시를 낭독할 것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한 시는 어느새 다른 목소리들이 슬며시 끼어들면서 파도처럼 몰려왔다 몰려가는  즉흥곡을 닮아갈 것이다. 간혹 으르렁거리며 달려오는 물마루가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를 집어삼키겠지만 그들은 낭독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한 낭독과 다음 낭독 사이에 누구는 모래밭에 묻어둔 캔맥주를 들이켜고 누구는 바람과 싸워가며 담배를 피울 것이다. 빈 캔이 날아가지 않게 쓰레기봉투에 따로 담아 큰 돌멩이로 단단히 눌러놓을 것이다. 담배꽁초는 꼼꼼히 불씨를 단속하고 휴대용 재떨이에 담아 빈 캔들 옆에 잘 놔둘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이고 욕먹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기 검열은 자기 연민보다 훨씬 쉬운 자동 반사 같은 일이었다. 낭독이 무르익고 밤이 이슥해지면 누군가 흥에 겨워 밤바다에 뛰어들 것이다. 누구는 개척자의 뒤를 따라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에 들어갈 것이고 수영을 못하는 누구는 뒤에 남아 요란스럽게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칠 것이다. 응원자로 남은 이들은 목이 쉬도록 웃고 소리칠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깜짝 놀랄 고요가 찾아오면 누군가 절정의 끝을 마무리하는 사람처럼 속삭일 것이다. 아, 모처럼 실컷 웃었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 여름 그들에게 과연 내일은 있을까? 그건 우리도 그들도 알 수가 없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지금' 그 여름을 준비하여 각자의 시집을 고르고 있다는 것, 그 여름이 오늘의 그들에게 내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여름의 일은 모르겠고 적어도 오늘의 그들에겐 내일이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이 이렇게 전개되고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주혜의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전개되고 이렇게 마무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