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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페터 회 장편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by 답설재 2023. 6. 12.

페터 회 장편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이누이트 족 소년 이사야가 눈 내린 지붕 위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웃의 서른일곱 살 처녀 스밀라 야스페르센이 이 소년이 위협을 받아서 실족한 것으로 확신하고 범인을 찾아 응징하는 추리소설이다.

부유한 덴마크인과 이누이트 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스밀라 야스페르센은 냉소적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지적 여성이다. 아름답기까지 한 야스페르센이 범인을 따라 덴마크에서 그린란드의 빙하 위에 서게 된다.

 

"왜 그 아이가 쫓기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 애가 떨어진 지붕 위에 있던 눈 때문이에요. 난 그 애의 발자국을 봤어요. 난 눈에 대한 감각이 있어요."

뤼빙은 피로한 듯 앞으로 똑바로 쳐다봤다. 갑자기 그녀의 연약함이 드러났다.

"눈은 변덕의 상징이에요. 욥기에 나오는 것처럼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외투를 입었다. 나는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받았던 수업들이 기묘한 파편이 되어 내 두뇌 속의 끈끈이 종이 위에 들러붙어 있기는 했다.

"맞아요. 그리고 진실한 빛의 상징이기도 하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요. '머리와 머리털은 눈과 같이 희고.'"(104~105)

 

"난 눈에 대한 감각이 있어요" 이 말로 소설의 제목을 정한 것이겠지?(『Miss Smilla's Feeling for Snow』혹은 『Smilla's Sense of Snow』).

 

눈이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 이사야의 무덤에 내리던 카니크다. 얼음은 아직도 따뜻해서 눈송이는 그 위에서 녹아버렸다.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눈송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지 않고 바다에서 자라나는 것 같다. 내 위쪽의 바위탑 꼭대기에 자리 잡은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것 같다. 처음에는 새로 형성된 육면체의 눈송이가 내린다. 48시간 후에 눈송이는 부서지고 윤곽은 흐려진다. 열흘이 될 때까지 눈은 낱알 같은 결정이 되고, 두 달 후에는 결이 조밀해진다. 2년이 흐르면 눈과 빙하 위의 싸라기눈 사이의 변환기에 접어든다. 3년 뒤에는 만년설이 된다. 4년 후에는 커다란 덩어리로 된 빙하 결정으로 변모한다.

여기 겔라 알타에서 얼음 결정은 3년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그때까지 빙원은 얼음 결정을 바다로 밀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결정은 부서져 바깥으로 떠내려가다가 녹아서 흩어져버리고 바다에 흡수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올라가 새로 눈이 되어 내린다.(586)

 

이 소설은 서정적이기도 하지만 식상할 정도로 냉소적이고 현학적이다.

이걸 정말 읽어야 하나 싶을 때가 여러 번이었고, 한두 문단을 띄어 읽으면 스토리를 놓치게 되는지 시험해보기도 하며 읽었다. "다시 읽겠는가?" 물으면 "됐다"고 하겠다.

 

아름다운 소년 이사야가 위협을 느껴서 지붕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처럼 범인이 빙하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데 대한 보상이라고 할 만큼 선연했다.

 

퇴어크의 힘은 소진되기 직전이었다. 이런 풍경은 이런 곳에서 자라나지 않은 사람의 기운을 빼버린다.

아마도 곧 얼음이 그의 아래에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차가운 물이 그의 몸에서 무게를 앗아가고 아래로 빨아들여주는 것이 안식처럼 보이게 될 수도 있다. 아래에서부터 보면 심지어 이런 밤에도 얼음은 네온불빛처럼 푸른 기운이 도는 흰색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오른쪽을 향해 얼음을 건너갈지도 모른다. 오늘 밤 온도는 한층 더 떨어질 것이고 폭풍우가 닥쳐올 것이다. 그는 단지 두 시간 정도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점에 이르면 그는 멈출 것이고 추위가 그를 석순처럼 변형시킬 것이다. 얼음 껍질이 거의 액체화된 생명 주위를 감싸면 마침내 그의 맥박이 멈추고 풍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얼음을 이길 수 없다.(618~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