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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직박구리에게

by 답설재 2023. 8. 17.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 존재조차 몰랐었어. 관심이 없었던 거지.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부터 꽥꽥 쫵쫵 악착같이 떠들어대는 녀석들,

'행동대장'이 꽥꽥거리며 지휘하는 대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달콤한 열매가 달린 나무를 점령하는 것들,

익은 열매를 거들낸 다음엔 익지 않은 것조차 감미만 돌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들,

방조망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라도 실컷 따먹고는 나오지를 못해 푸드덕거리다가 꺼내주면 고마워하지도 않고 달아나는 것들, 꺼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죽어버리고 날개와 깃털, 해골만 남기는 것들,

이쪽저쪽으로 휙 휙 바람을 일으키며 위협 비상을 하는 것들,

이(李) 상무는 산까치로 부르지만 뭘로 봐도 직박구리가 분명한 것들,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겠지 싶어 했지만 끝내 그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직박구리 : DAUM 이미지 (부분, 2023.8.11. 오후)

 

 

마침내 너희를 '액면' 그대로 평가한 글을 찾았어. 읽어봐.

'머리 하얀 직박구리(白頭鳥)' 이야기지만 그냥 직박구리라고 하면 너희 토종 직박구리를 가리키고 이 글에서도 너희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까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겠지.

 

다만 직박구리라는 이름이 영 인상이 좋지 못하기는 하다. 집비둘기를 제외하면 한국인에게 가장 미운털이 박힌 새가 바로 직박구리가 아닐까. 일단 울음소리가 고약하다. 계절과 시간을 가리지 않고 삐이이이익 삣 삐이익 뺵빽빽빽 울어대는데, 미학적으로도 성량으로도 감히 비교할 새가 없을 정도다. 어느 조류도감에서는 '새가 내는 가장 매력 없는 소리 중 하나'를 '일 년 내내 무자비하게 뱉어낸다'라고 직설적으로 불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 저자가 영국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음으로서의 경쟁력도 세계 수준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다 가끔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쁜 소리로 노래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조차도 타고난 성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생긴 것이 예쁜 구석이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몸통은 칙칙한 회색이고 배에는 흰 얼룩이 지저분하게 박혀 있으며, 머리깃은 죄다 삐죽삐죽 서 있다. 볼이 밤색이기는 한데 그조차도 선명하다기보다는 때 묻은 느낌이고, 홍채도 붉은 기 도는 갈색이라 가까이서 보면 무섭다는 생각부터 든다.

거기에 하는 짓도 마냥 예쁘지만은 않다. 직박구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식탐이다. 특히 달콤하거나 물이 많은 먹이라면 사족을 못 써서, 목련이 피면 목련 꽃잎을 따먹고, 벚꽃이 피면 주둥이가 꽃가루로 노랗게 될 때까지 벚나무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 여름이 되면 제철 매미가 또 별미인 모양이다. 수액으로 배를 채운 매미는 수박처럼 달고 시원한 맛이 난다고 하는데(들은 소리다. 실제로 먹어본 적은 없다), 직박구리들은 나무 위를 오가며 잘 여문 매미를 쏙쏙 잡아먹는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열매를 노리는데 빨갛게 익은 산수유나 팥배나무에서 떼 지어 깩깩거리며 다른 경쟁자 새들을 쫓아내기도 하고, 좀작살나무에 들러붙어 구슬 같은 보라색 열매를 순식간에 해치우기도 한다. 겨울이 되면 뒷산 직박구리들이 감나무를 찾아 주택가로 몰려오는데, 동네 까치밥의 절반 이상이 직박구리 배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게다가 수는 어찌 그리 많은지, 서울연구원에서 2000년부터 2012년까지의 자료를 취합한 분석에서, 직박구리는 서울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새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외래종인 집비둘기는 집계하지 않았으나 까치, 박새, 멧비둘기 등의 전통적인 강자를 모두 제친 것이다. 물론 체계적인 개체수 조사는 아니므로 실제로 직박구리가 가장 많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서울 시민과 직박구리의 더없이 가까운 관계, 또는 직박구리가 여러모로 눈에 띄는 새라는 사실 정도는 입증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조호근 「머리 하얀 직박구리」(조명독법鳥鳴讀法 제18회) 《현대문학》2023년 8월호.

 

 

어때?

너희를 좋아할 만한 내용도 있겠지 싶어서 끝까지 읽었어.

 

갓 둥지를 떠난 직박구리 새끼는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꼬리가 짤막해서 장난꾸러기 꼬마 같은 인상을 주는데, 제법 머리가 좋은 편이라 먹이를 주는 사람을 알아보기도 하고, 무사히 성장해서 날려 보낸 후에도 종종 돌아와서 먹이를 청하기도 한다. 이렇게 길들이기 쉽다는 특성 때문에, 노랫소리와 용모가 빼어난 일부 동남아시아산 직박구리과 새들은 관상용으로 사로잡혀 온갖 고초를 겪기도 한다.

 

좋은 면이라면 이 정도?

억울해?

이것 말고 자랑할 만한 게 있어?

위의 내용 다음에 "시끄러운 울음과 투박한 외모로 무장한 한국의 직박구리가 관상조로 가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문장도 보여.

이 글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옛그림에 등장하는 직박구리 종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난 거기에는 관심 없어.

한 가지가 더 있긴 해.

이 글을 쓴 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희를 좀 잘 보이게 하고 싶었던 걸까? 이렇게 덧붙이고 있거든.

 

사실 내가 생각하는 직박구리의 매력 포인트는 따로 있는데, 바로 엉덩이 깃털이다. 흔히 아래꼬리덮깃이라 부르는 부위로 전체적으로 칙칙한 잿빛인 직박구리지만 유독 이곳의 깃털만은 흰색과 짙은 갈색이 선명하여, 작은 화살촉 문양 대여섯 개가 모여 앙증맞은 세모꼴을 이루고 있다.

 

이제 만족해? 엉덩이 깃털, 겨우 그건데? 이 칭찬마저 이분 말고는 그 누가 발견할 수 있었을까?

내가 너희와 어떻게 지내면 좋겠니?

너희가 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면, 나도 별 수가 없지.

기다려!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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