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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난 맛있는 건 나부터 먹어"

by 답설재 2023. 8. 7.

 

 

 

멋진 레스토랑 분위기의 식탁에 호텔에서나 보던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

그 여배우가 스스로 차린 음식이다.

일흔이 넘었다는데도 아직 참 고운 그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는다.

"난 말이야, 맛있는 것은 나부터 먹어. 자식들만 챙겨주면 엄마는 이런 건 싫어하거나 못 먹는 줄 안다니까?"

그녀가 한 말은 꼭 이렇게는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비슷하긴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아주 미웠다. 아니, 그녀를 사정없이 미워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자식을 위해 헌신한, 헌신까진 아니라 해도 맛있는 것 먹으면 가족들부터(가족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한 사람은 허탈해하지 않았을까?

난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거지? 이제 와서 그녀를 따라갈 수는 없다 해도 혹 후회하는 사람은 없었을까?

그래! 바로 그거야! 좋아! 늦었지만 나도 내 입부터 챙겨주겠어! 결심하기도 했을까?

아무리 그래도 '별 미친...' 하고 중얼거린 사람은 없었겠지? 멋진 집, 멋진 식탁에서 멋지게 차려입고 근사한 식사를 시작하는 그녀를 선망하면 했지, 저주하거나 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살아갈 만큼 돈을 벌지 못한 걸 후회한 사람은 없었을까?

 

나는 주로 이걸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근근이 이어져 내려온 실낱 같은 한국의 전통문화가 저 한 마디로 얼마나 손상을 입게 되었을까?

얼마나 흔들렸을까?

아주 뒤집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까?

차라리 그녀의 생각을 뒤집어버리고 싶었을까?

텔레비전에서 그 장면을 본 것은 적어도 두어 달은 되었을 텐데 나는 아직도 그걸 잊지 못하고 때때로 떠올리고 있다.

이 좋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거지?

도덕, 윤리 교과서도 이젠 저렇게 바뀌었나? 바뀌어 가고 있나? 눈 감고 말면 그만인데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돈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인 건 맞는 것 같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깨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 여배우를 원망하는 사람이 그리 여러 사람은 아니라는 건 인정해야 하겠지?

세상은 이렇게나 변하는 것이니......

 

알랭 드 보통은 '도덕적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높은 가치에 관해서 그리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우리에게 그런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라고 해봤자, 이른바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쓴, 판매도 신통치 않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어떤 에세이집 한 권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 너머의 도시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과시하는 세계 최고의 광고 대행사들이 저마다 주마등 같은 연금술을 보여주면서, 신제품 세재나 맛 좋은 과자의 이름으로 우리의 감각 섬유에 불을 지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레몬 향이 들어간 바닥 세척제라든지, 후추 뿌린 과자에 관해서는 자주 생각하는 반면, 인내와 정의에 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다. 이 두 가지 기본적인 미덕이 대개는 유명한 광고회사인 영 앤드 루비캠의 고객이 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게 차려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엄마는 이런 걸 먹을 줄 모른다니까!' 하는 녀석이 더러 있기는 하겠지?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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