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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by 답설재 2023. 3. 1.

안규철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현대문학 2013

 

 

 

 

 

 

연필, 먹, 펜 그림과 에세이 50여 편을 엮은 책이다.

그림 에세이집?

무심코 보는 사물로써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쉰 가지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렇다고 이제 다른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의 세상을 엿보는 것이 좋았다.

 

월간《현대문학》에 연재된 작품들이다. 이미 본봤는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읽었다.

그러니까 다음에 보면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겠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책' 코너에 놓아둘 것이다.

 

 

 

어린 시절 창가에서

 

 

나는 또래들보다 한 해 먼저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느라로 부모님은 호적을 고쳐 내 생일을 일곱 달이나 앞당겼다. 늦게 본 자식을 빨리 키워야겠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그 덕에 나는 나보다 한두 살에서 서너 살씩 더 먹은 아이들과 학교를 다녔다. 공부가 뒤처질까 걱정이 된 어머니는 이웃에 살던 사범대 학생을 과외 선생님으로 붙여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 짜리에게 독선생 과외를 시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진한 곤색의 교복차림으로 우리 집에 왔는데 그때 무슨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 안에 상을 펴놓고 선생님과 마주 앉아 있으면 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고, 이 고역에서 풀려날 때만 기다리며 몸을 비틀고 있을 때 어머니가 과일 같은 걸 내오셨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공부 시간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벌을 받는 일이 있었다. 그 벌이라는 것이 특이하게도 창문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설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길 건넛집 빨랫줄에는 빨래가 널려 있고 마당에 해바라기가 피어 있고 해바라기 옆에는 담장이 있고 담장 너머에는 가게가 있고 가게 앞 공터에는 강아지가 낮잠을 자고 있어요......" 하는 식이다. 벌을 받는다기보다는 무슨 새로운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익숙하게 보아온 세상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로 설명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서 "다 했는데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빼놓았거나 얼버무렸던 것들을 신기하게도 찾아냈다. 보이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이 위에 물감 대신 말로 풍경화를 그리는 일과 같았다.

그때 창가에 서서 그 기이한 벌을 받으며 보낸 시간은 아마 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나는 세상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세상이 하나의 책처럼 읽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놀라운 책은 읽고 또 읽어도 항상 새롭고 끝이 없었다. 그 젊은 선생님은 물론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내게 그것은 일생일대의 발견이었다. 나는 때때로 또래들과의 놀이에서 빠져나와 세상에 대한 골똘한 관찰자가 되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다.

 

 

그중 한 작품이다. 그림은 표지화 오른쪽 윗편에 있다.

그 '선생님'은 진짜 벌을 줄 수는 없으므로 벌을 주는 것처럼 공부를 시킨 것 아닐까?

세상을 관찰하며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게 해 준 것 아닐까?

내가 그 사범대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과 이별한 지 오래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