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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Ⅱ

by 답설재 2009. 5. 8.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윤제림 (1959~ )

 

 

저승사자 따라가던 사람이 저승사자가 되어 옵니다. 회심곡(回心曲)에선 활대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달려온다고 그려지는 사람. 그러나 저승사자도 백인백색. 나같이 둔한 사람은 벼랑길 천리를 제 발로 기어옵니다. 산허리 하나를 도는 데도 한나절, 만고강산 부지하세월입니다. 날 듯이 걸으라는 황천보행법도 못다 익히고 허구렁길 밝히는 주문도 자꾸 잊어서 밤낮 헛발입니다. 죽은 사람 데리고 돌아갈 일이 걱정입니다. 저승사자가 병아리 귀신보다 허둥거리면 무슨 망신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못나도 귀신은 귀신이어서 아득한 천지간을 수도 없이 자빠지고 구르다 보니 길 끝입니다.

 

문을 여니 구청 앞 버스 정류장. 여기서부터는 자신 있습니다. 아직은 이쪽이 더 익숙합니다. 살던 동네니까요. 그래서 저승은 햇귀신한테만 심부름을 시키는 모양입니다. 살던 동네라도 오래 못 보면 남의 동네처럼 설어지니까요. 그래서 저승은 젊은 귀신들한테만 사자를 시키나 봅니다. 하긴, 저승사자가 지하철 1호선 2호선도 구분 못해서 엉뚱한 곳이나 헤맨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세월아 네월아 길이나 묻고 다니면 어디 저승 공작원 체면이 서겠습니까.

 

저승사자가 이 근방에 지금 막 죽었거나 금세 죽게 생긴 사람 없느냐 묻고 다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저승사자는 묻지 않고도 조등이 내걸린 골목을 대번에 찾아냅니다. 차일 아래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 끼여서도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저승사자가 낯선 이름이 적힌 쪽지나 사진 같은 것을 들이밀며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는 데려가야 할 사람과 잘 아는 사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모나 형제 혹은 친구를 데려가는 사람이 누군인지를 알면 놀랄 것입니다. 그래서 저승사자들은 때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진땀을 뺍니다.

 

저승사자.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을 납치해가는 외국의 기관원이라 해도 좋고, 더 좋은 세상으로의 망명이나 밀입국을 꿈꾸는 사람을 돕는 정의의 사자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그들은 철면피나 냉혈한이 아니란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순순히 세상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 아닐까요. 안심하십시오. 아, 그 사람과 함께 가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고 마음 푹 놓아도 좋을 사람이니까요. 저승사자는 면식범이니까요.

 

 

 

 

 

귀신 중에서는 젊은 귀신에 속하는 한 저승사자가 한 명 데리러 이승으로 오면서 늘어놓은 사설(辭說)입니다. 저승사자의 체면이 가련하기도 하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죽어 저승에 가는 일이 대단하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괜찮겠네, 뭐.'

그런 느낌을 가지게 했습니다. 젊은이가 그런 생각 가진다면 당연히 안 될 생각이지만.

 

2007년 10월 17일, 「알고 보면 우리와 친밀한 사이인 저승사자」라는 제목의 글에서 소개했던 시입니다. 그때 출처를 적어두지 않아서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현대문학』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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