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흥식 「절정」

by 답설재 2009. 4. 1.

 

 

 

 

절 정

 

 

눈부신 슬픔의 구름이 사라지고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는 뜯겨나가는 제 몸과 사자 무리를 한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우고

거기엔

재봉질하던 어머니와

일찍 집을 나가 오래 잊혀졌던 누이가 먼지도 없이 내렸다

그것은 들판과 구름을 불태우면서.

 

 

 

박흥식 시인의 시집 『아흐레 민박집』(1999, 창비)에서 뽑은 시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가 하나 있다. “뜯겨나가는 제 몸”과 자신의 살을 물어뜯는 “사자 무리”를 제 눈으로 보고 있다. 검은 소의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는 장면을 시인은 (또는 소는) 느린 화면을 보듯 보고 있다. 이 극사실적 서술이 정서 환기를 위한 일체의 수식들을 배제한 채 담박하게 제시되어 있다. 검은 소의 죽음에 이어, 그 죽음 위로, 또는 죽음의 눈꺼풀 안으로, “재봉질하던 어머니와/일찍 집을 나가 오래 잊혀졌던 누이가 먼지도 없이 내렸다”고 씌어져 있다.

죽음과 추억, 극사실과 샤갈적 몽환, 잔인과 비애의 짧은 병치가 성립시키는 정서의 볼륨이 숨막히는 바 있다. 게다가 “절정”이라니! 어떤 길고 소상한 설명도 우리로 하여금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와 누이를 이토록 아파하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이루어져가는 순간을 이토록 ‘천천히’ 응시하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무슨 짓으로서 시이고자 하는 것인가.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글을, 글씨를 새기는 노릇, 그 어떤 응급의 실용보다도 간절하게 글을 새기는 노릇이란 대체 무엇인가. 저 죽임과 죽어감들 앞에서. 이 오래고 압도적인 화두가 온몸에 다시 아프다. -김사인(시인)

 

현대문학』2009년 3월호, <누군가의 시 한 편>(232~233)에서

 

 

< 메모 >

 

「절정」, 시를 읽고, 생각에 잠겨 감탄과 탄식 외에는 별 도리가 없도록 하는, 시와 시 이야기를 바라보며 잊지 않기 위하여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Ⅱ  (0) 2009.05.08
최문자 「부토투스 알티콜라」  (0) 2009.05.02
  (0) 2009.03.31
목마와 숙녀  (0) 2008.01.21
알고보면 우리와 친밀한 저승사자  (0) 2007.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