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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by 답설재 2009. 3. 31.

 

 

 

 

     봄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

봄은 왔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서럽다 이를 두고 봄이냐

치워라 꽃잎에도 눈물뿐 흩으며

새 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 보느냐 벌겋게 솟구치는 봉숫불이

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리오

그리워라 내 집은

하늘 밖에 있나니

 

애달프다 긁어 쥐어뜯어서

다시금 짧아졌다고

다만 이 희끗희끗한 머리칼뿐

이제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김소월, 「봄」(『조선문단』, 1926년 3월호)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浴不勝簪 혼욕부승잠

 

 

‘두시언해본’은 생략(현대문학 2월호, 199쪽에 있음.)

 

 

 

 

  25세의 청년 시인이 80년 전에 시도한 번역이다. 이 번역의 저변에 놓여 있는 번역에 대한 근본이해, 그리고 이 번역을 받치고 있는 시적 감수성과 그 설득력은 탄복할 만하다. 『두시언해』(1481년) 이래 무수한「春望」의 번역들 가운데 이 수준을 넘어서는 예가 몇이나 될 것인가. 이 역시는 우리로 하여금 번역, 특히 시의 번역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이 번역자는 원작의 말뜻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두보의 혼이랄 것, 원작「春望」의 넋이랄 어떤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입고, 그 넋으로 하여금 조선말 ‘버전’으로 공수를 내리게 한다. 그것으로 시의 번역을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번역시는 두보가 조선 사람으로 되살아와 다시 쓴다 해도, 어설피 살아와서는 결코 이르기 어려울 비애와 처절의 극한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에 임하는 이 황홀한 근본주의!

우리의 시 형식이 오늘과 같은 포용력과 진폭을 갖게 되기까지는, 전통적 리듬이 교란되고 해체되던 시기에 새로운 시 형식에 대한 모색을 번역이란 형식으로 치렀던 신문학 초창기 문사들의 고투에 생각보다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자 한다. -김사인(시인)

 

 

현대문학, 2009년 2월호, 198~199.

 

 

 

 

  <메모>

한 달 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생각도 가능한 한 하지 않고, 한 편의 시(김소월의 '봄')만 감상한다면 이와 같은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해질까, 생각하며.

또한 김소월의 번역시「봄」과 함께 "4월은 잔인한 달, 불모(不毛)의 땅에서 라일락은 피어나고, ……." 그 T. S. 엘리엍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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