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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목마와 숙녀

by 답설재 2008. 1. 21.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1955년)

 

 

 

 

어느 신문의 기획 기사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 詩 100편’에서 「목마와 숙녀」를 읽었습니다.

 

사람은 잠깐씩이라도 다 멋있게 사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도 잠깐 멋있게 지냈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목마와 숙녀」가 통속적이거나 감상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멋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밤 늦도록 마시고 누가 웃지도 않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고 했고, 또 마셨고 그가 또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고 했고 우리는 더 마셨습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라고 했지만 외로웠고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라고 해서 우리도 목이 메었습니다.

 

그렇게 마시며 멋지게 지내던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갈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눈치를 보게 되었고 ‘청첩장’이나 주고받게 되었고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짧게 만나면서도 누가 먼저 그만 일어서자고 하면 고마워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때가 있어서 어느 시골에서 아직도 혼자 그 옛날의 술을 책임지고 마시고 있다는 친구의 안부를 전해 들으며 미안함을 느겼습니다. 누구를 만나보아도 별 수 없이 초라해져 있음에도 이렇게 건조하고 힘든 이 시간을 떠나 그때를 찾아 돌아가면 그 자리에는 그때 그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밤안개 속 목로주점에. 시외버스 정류장 맞은 편 이층 커피숍에......

 

그렇게 술을 마시던 그 친구 L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입니다.

나는 그 하숙집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또 나가려면 담배나 내놓고 나가라던 그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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