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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8

강우식 「종이학」 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과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 2009. 6. 10.
처서處暑 처서處暑 정 양 냇물이 한결 차갑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들이 뒤돌아보는 일 없이 어제도 이렇게 흘러갔었다 흘러가서 아주아주 소식 없는 것들아 흘러가는 게 영영 사라지는 몸부림인 걸 흘러오는 냇물은 미처 모르나 보다 ..................................................................... 정 양 1942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68년『대한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빈집의 꿈』『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눈 내리는 마을』『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나그네는 지금도』등이 있으며, 을 수상한 바 있다. 『현대문학』2008년 11월호 죽어서 무덤을 남기는 경우 말고는 다 되풀이되는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2009. 6. 2.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Ⅱ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윤제림 (1959~ ) 저승사자 따라가던 사람이 저승사자가 되어 옵니다. 회심곡(回心曲)에선 활대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달려온다고 그려지는 사람. 그러나 저승사자도 백인백색. 나같이 둔한 사람은 벼랑길 천리를 제 발로 기어옵니다. 산허리 하나를 도는 데도 한나절, 만고강산 부지하세월입니다. 날 듯이 걸으라는 황천보행법도 못다 익히고 허구렁길 밝히는 주문도 자꾸 잊어서 밤낮 헛발입니다. 죽은 사람 데리고 돌아갈 일이 걱정입니다. 저승사자가 병아리 귀신보다 허둥거리면 무슨 망신이겠어요. 그러나 아무리 못나도 귀신은 귀신이어서 아득한 천지간을 수도 없이 자빠지고 구르다 보니 길 끝입니다. 문을 여니 구청 앞 버스 정류장. 여기서부터는 자신 있습니다. 아직은 이쪽이 더 익숙합니다. 살.. 2009. 5. 8.
최문자 「부토투스 알티콜라」 부토투스 알티콜라° 최 문 자 당신은, 누우면 뼈가 아픈 침대 짙푸른 발을 가진 청가시 찔레와 너무 뾰족한 꼭짓점들 못 참고 일어난 등짝엔 크고 작은 검붉은 점 점 점. 점들이 아아, 입을 벌리고 한 번 더 누우면 끝없이 가시벌레를 낳는 오래된 신음이 들려야 사랑을 사정하는 당신은 일용할 통증 멸종되지 않는 푸른 독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아픈 침대 커버를 벗긴다. 아아, 이거였구나. 전갈 한 마리 길게 누워 있다. 유일한 고요의 형식으로 당신과 내 뼈가 부토투스 알티콜라를 추다가 쓰러진 전갈자리. 굳은 치즈처럼 조용하다. 전갈의 사랑은 그 위에 또 눕는 것. 같이. ˚ 부토투스 알티콜라-전갈이 수직으로 달린 꼬리로 추는 구애 춤 ............................................ 2009. 5. 2.
박흥식 「절정」 절 정 눈부신 슬픔의 구름이 사라지고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는 뜯겨나가는 제 몸과 사자 무리를 한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우고 거기엔 재봉질하던 어머니와 일찍 집을 나가 오래 잊혀졌던 누이가 먼지도 없이 내렸다 그것은 들판과 구름을 불태우면서. 박흥식 시인의 시집 『아흐레 민박집』(1999, 창비)에서 뽑은 시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가 하나 있다. “뜯겨나가는 제 몸”과 자신의 살을 물어뜯는 “사자 무리”를 제 눈으로 보고 있다. 검은 소의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는 장면을 시인은 (또는 소는) 느린 화면을 보듯 보고 있다. 이 극사실적 서술이 정서 환기를 위한 일체의 수식들을 배제한 채 담박하게 제시되어 있다. 검은 소의 죽음에 이어, 그 죽음 위로, 또는 죽음의 눈꺼풀 안.. 2009. 4. 1.
봄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 봄은 왔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서럽다 이를 두고 봄이냐 치워라 꽃잎에도 눈물뿐 흩으며 새 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 보느냐 벌겋게 솟구치는 봉숫불이 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리오 그리워라 내 집은 하늘 밖에 있나니 애달프다 긁어 쥐어뜯어서 다시금 짧아졌다고 다만 이 희끗희끗한 머리칼뿐 이제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김소월, 「봄」(『조선문단』, 1926년 3월호)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浴不勝簪 혼욕부승잠 ‘두시언해본’은 생략(현대문학 2월호, 199쪽에 있음.) 25세의 청년.. 2009. 3. 31.
목마와 숙녀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 2008. 1. 21.
알고보면 우리와 친밀한 저승사자 학교에 근무하니까 대체로 교장이 나이가 가장 많아서 겸연쩍게 노인 취급을 당하는 수도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새파란(?) 젊은이들에 비해 '노인은 노인'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가을이어서 그런가요? 10월이고 날씨조차 '가을맞고' 그러니까 '올해도 거의 다 갔구나' 싶어서 서글퍼집니다. 지난 3월(그러니까 저쪽 학교에 근무할 때), 이 블로그의 그 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람」의 주인공인 함수곤 교수께서 짤막한 글을 하나 달라고 해서 '알고 보면 우리와 친밀한 사이인 저승사자'란 글을 써주었는데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저도 이제 "젊은이"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다 늙어서 건강하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 세태는 정말 싫습니다. 그런 이들은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 걸까요? 오늘.. 2007.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