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은 이야기384 문정희 「겨울 사랑」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 사보(社報)에서 읽었습니다. 병원 뒤편 한강 그 하늘 위로 다시 이 해의 눈이 내릴 때 나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벗어나는 그곳에서 3박4일을 지내며 평생을 아이들처럼 깊이 없이 살아온 자신을 그 풍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눈송이들이 이번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건물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듭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담배까지 피우며 걸어다닙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들은 무성영화 같습니다. 풍경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로.. 2010. 2. 8. 이성부 「논두렁」 논두렁 이성부 이 논두렁길이 백두산 가는 길이라니 놀랍습니다 하다못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난다는 옛사람들 말씀 생각나 고개를 끄덕입니다 물꼬 막으며 잠시 서서 바라보는 먼 산으로 치미는 가슴 울화 가라앉히고 새참 먹은 뒤 담배 한 대 태우며 숨 쉬는 서러운 하늘로 어느덧 상것들 다시 힘이 솟았지요 저기 저 말을1 뒤 푸른 소나무밭을 지나 뒷산으로 길을 잡아 올라서면 구비구비 끝없이 펼쳐진 우리나라 땅 모두 산이었어요 저 많은 크고 작은 산들 두루 거쳐 몇 날 몇 달을 걸어가노라면 할아버지 산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옛 어르신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논두렁길은 예사 길이 아닙니다 백두산 실핏줄이 여기까지 뻗어 내려와서 태어나는 아기들 포근하게 지켜주는 것을 압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가리지 않고.. 2010. 2. 4. 고영민 「앵 두」 앵 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깨끗한 솜씨와 감각이다. 시 쓰기 시험이 있다면 모범답안 가운데서 빠질 리 없을 것이다. “둥글고 빨간 화이바”의 그녀 얘기가 ‘앵두’란 두 음절의 제목에 받쳐져 산뜻한 균형과 더불어 아연 생기롭다. ‘앵두’ 쪽에서도 마찬가지. “빨간 화이바”의 그녀와 나란히 놓임으로써 예기치.. 2010. 1. 11. 박남원 「그렇다고 굳이」 그렇다고 굳이 박남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욕정에 이끌려 하룻밤을 잤다.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래도 무언가 진지함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해서 땀 흘리는 정사가 막 끝났을 때, 우리는 인간의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가끔 내 스스로에게 돌아오기는 했다. 가끔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긴 했다. 그때마다 흔들리며 바람이 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울지는 않았다. "인간의 꿈과 희망"을 기억하는 70년대적 영혼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이 창궐한 욕망과 욕정의 시간에, 촌스럽게도? 읽기에 따라 시 속의 "하룻밤"은 모든 타락한 세속적 삶의 은유로도 읽힌다. 희망과 .. 2010. 1. 5. 김춘수 「꽃」-양지오름길, 양지뜨락을 생각하며 어젯밤에는 꿈 끝에 ‘양지오름길’ ‘양지뜨락’ 생각을 하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이들을 꾸중하는 꿈을 많이 꾸었는데, 요즘은 아이들은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양지오름길’ ‘양지뜨락’이라는 이름은, 지금은 가평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근무하는 원옥진 선생이 작년 봄에 아이들에게 공모를 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교문에서 교사(校舍)까지 올라오는 길을 뭐라고 부르는가, 어떻게 불러야 편리한가, 그 길의 이름이 없어서 불편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이야기한 끝에 공모를 제안했던 것입니다. ‘양지뜨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뜰에서 가령 도서바자회를 한다고 치면, “도서바자회를 어디서 하지요?” 물을 때 “건물과 화단 사이에서 합니다.” 하고 대답하면 참 애매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공모(公募)는 참 .. 2009. 11. 23. 천상병 「小陵調 -70년 추석에」 천상병(千祥炳, 1930. 1. 29 일본 효고현 ~ 1993. 4. 28)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소풍 온 속세를 떠나 하늘고향으로 돌아간다는《귀천(歸天)》으로 유명하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위키백과의「천상병」은 이렇게 시작된다. 더 자세한 부분을 보면 이런 해설도 나온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으며, 중앙정보부에 의해 과장된 사건으로 판명된 소위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도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그때의 처참한 .. 2009. 11. 19. 김수영 「눈」 눈 『거대한 뿌리』(김수영 시선, 민음사, 1997, 개정판 4쇄)를 꺼내어 「눈」을 찾았습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마흔일곱에 버스에 치여 죽은 詩人 김수영(1921~1968)은, 웬 일일까요, 자꾸 가슴을 앓다가 죽은 시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새벽에 본 하얀 눈 위에 기침을 하다가 나온 가래를 뱉을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마음놓고’. 쿨룩쿨룩 하다가 .. 2009. 10. 24.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江」 지금까지 시집은 12권을 냈다. 그 중에서 뽑은 것이지만, 어쩐지 그 수확이 변변찮다. 결국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이 길의 허망함만 느낄 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또다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들메를 고칠 수밖에는 없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내 초라한 주머니가 조금은 넉넉해지기를 바란다. 이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朴在森 시인은 시집 『울음이 타는 가을江』(미래사, 1996, 1판8쇄)에 그렇게 썼습니다. 그 시집은 1991년에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에 제15시집 『다시 그리움으로』를 냈고, 1997년 6월 8일, 삼천포가 고향이지만 사실은 1933년 일본 동경 변두리 어느 곳에서 태어난 그는 10여 년의 투병생활 끝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 2009. 10. 9. 한상순 「뻥튀기는 속상해」 뻥튀기는 속상해 한상순 사실 난, 고소하고 달콤한 입안에서 살살 녹는 뻥튀기인데요 딱딱한 곡식 낱알로 있다가 깜깜한 기계 안에서 뜨거운 거 꾸욱 견뎌 내고 뻥이요! 하고 태어났는데요 왜 내 이름을 갖다 아무 데나 쓰는 거죠? -선생님, 그거 뻥 아니죠? -민수 걔 뻥쟁이야 -너, 그 말 뻥이지? -야! 뻥치지 마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 시가 실린 동시집은 『뻥튀기는 속상해』(2009, 푸른책들)입니다. 동시인 박혜선이 이 동시집을 소개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오늘의 동시문학』문학과문화, 27호, 2009 가을호, 186) "……. 동시를 쓰는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있다. 갈증의 원인은 저마다 다르며 그 처방 또한 다르다. 내게 꼭 맞는 처방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동.. 2009. 9. 26. 이병초 「봄밤」 봄 밤 이병초 공장에서 일 끝낸 형들, 누님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학산 뽕나무밭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창수 형이 느닷없이 앞에다 대고 “야 이년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라!” 하고 고함을 질러댑니다 깔깔대던 누님들의 웃음소리가 딱 그칩니다 옥근이 형 민석이 형도 “내껏도 쪄도라, 내껏도 좀 쪄도라” 킬킬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누님들은 다시 깔깔대기 시작합니다 “야 이 호박씨덜아, 내 고구마 좀 쪄도랑게!” 금방 쫓아갈 듯이 창수 형이 다시 목가래톳을 세우.. 2009. 9. 8. 강기원 「장미의 나날」 장미의 나날 강 기 원 그 동네에선 우리 집 장미가 제일 붉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장미가 있었지만 유독 장미집이라 부르곤 했는데요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아버진 휘늘어진 넝쿨 밑동에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나 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는데요 비밀스런 겹겹의 꽃잎은 뭉게뭉게 자꾸 피어나고 장미가 붉어지는 만큼 나와 동생은 자꾸 핼쑥해져갔는데요 그러고 보니 엄마의 낯빛도 갱지처럼…… 이상한 건 향기였지요 수백 수천 송이가 울컥거리며 피워내는 피비린내 마당을 넘어 집 안까지 기어든 넝쿨은 소파를 뚫고 곰팡이로 얼룩진 벽을 타고 생쥐가 들락거리던 아궁이 속에서도 붉게 검붉게 소문 같은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는데요 그 무렵 우린 아버지의 주문 따위 필요 없이 스스로.. 2009. 9. 7. 유치환 「古代龍市圖」 시인은 왜 시를 쓸까요. 대체로 “쓰지 않고는 공허하여 살 수가 없다.”지만, 그럼 우리는 왜 시를 찾는 것일까요. 좀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아, 정말 그래!’ 싶은 한 편의 시를 발견하는 순간 때문에 시를 찾아 읽는 것 아닐까요? 시인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앉아서 돈도 내지 않고 그 시인의 정신세계, 정서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순간의 희열을 위해 시를 읽습니다. 더구나 그 순간의 놀라움으로 나를 돌아보게 하고, 그 놀라움으로 나의 갈 길을 다시 설정하여 새로운 정신세계, 새로운 정서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그 전환점이 그리워서 시를 읽습니다. ‘詩’ 하면 바로 떠오르는 시입니다. 古代龍市圖 아득한 옛날 三神山 山麓 萬里ㅅ벌에는 한 해에 한 번 나라의 龍市가 섰었나니. 이 날이면 안.. 2009. 9. 5. 이전 1 ··· 28 29 30 31 3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