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千祥炳, 1930. 1. 29 일본 효고현 ~ 1993. 4. 28)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소풍 온 속세를 떠나 하늘고향으로 돌아간다는《귀천(歸天)》으로 유명하다.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위키백과의「천상병」은 이렇게 시작된다. 더 자세한 부분을 보면 이런 해설도 나온다.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했으며, 중앙정보부에 의해 과장된 사건으로 판명된 소위 '동백림사건'(1967년)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으며, 천상병 시인 자신도 전기고문으로 몸과 정신이 멍들었다. 그때의 처참한 수난을 천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고문)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1993년 가을엔가, 인사동의 찻집「귀천」에 들어가서 함께 들어간 누군가로부터 그 찻집이 그해 봄에 죽은 천상병 시인의 아내가 운영하는 찻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그의 아내라는 여인을 자꾸 쳐다보면서 '시인은 불우하게만 살다가 가고 없는데, 혼자 남아 그 문명(文名)을 이용한 장사를 해서 잘 먹고 잘 입으며 잘 사는구나.'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했었는데, 이후에 신문기사 같은 데서 그분은 천 시인의 친구의 여동생으로 1972년에 불구의 천 시인과 결혼했고, 이후 시인의 생활은 안정되어 감동적인 시를 많이 써내었다는 걸 알게 되어 참 미안해한 적이 있다.
그의 시집은 몰라도 시 한 편쯤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천 시인은 그의 기행(奇行)이 시집보다 더 잘 알려진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을 준다. 예를 들면, 1970년에는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 일이 있었다. 지인들은 갑자기 사라진 천 시인이 틀림없이 죽었다고 생각해버리고 유고시집 『새』를 발행했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의 일을 『시인의 초상』이라는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시집이 나온 지 두어 달 후 천상병이 나타나서 불호령을 했다. "이 문둥이 자슥들…… 내가 왜 죽었노!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래 우리는 그가 건재해 있는 것만도 반가웠다. 그동안 형은 시립병원에서 외부와 단절하고 지냈던 모양이다. 그가 나타났기 때문에 내가 그린 초상화가 들어간 천상병 시선 『주막에서』도 나올 수 있었다.
김사인 시인이 『현대문학』 2009년 10월호에 시집 『주막에서』에 실렸다는 시 「小陵調 -70년 추석에」를 소개하고 있다.**
小陵調
-70년 추석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의 '감상문'이 시 만큼이나 멋진 김사인 시인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보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렇게 읽어보라는 것에 대해, 김사인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여비'는 차비나 노자와 다른 말이다. 지난 세대의 곤핍과 근심이 쓸쓸히 연루되어 있는 말, 깊은 어딘가가 시큰해지는 말이다. 무엇보다 4연까지의 건조함을 보라. 건조할 수밖에 달리 길이 없는 진술, 그러나 진술의 그 담박함으로 해서 가난의 착잡한 잔가지들이 오히려 간략하고 투명하게 손질되어 있다.
5, 6연은 극한의 비애가 웃음으로 몸을 바꾸는 절묘한 장면이다. 객관 평서체의 말미에서 슬쩍 고개를 트는 주관 설의투의 작은 몸짓이, 가난의 우울하고 무거운 사실성 복판에 아연 천진한 생기의 공간을 한 뼘 열어 세운다. 기교의 몫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의 힘. 그러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아직 없는데, 다시 한 번 의표를 찌르는 끝 연의 서늘함이라니!
삶과 죽음과 돈의 숨 막히는 실물성을 '깊은 것'이라는 한 마디로 물꼬를 터 버텨내는 심미적 능력, 비현실적이기조차 한 저 적빈을, 그 복판에서, 삶에 대한 경의와 찬탄으로 환하게 들어올리는 -성화聖化하는- 마음의 능력. 나는 '시인 됨'의 한 결정을 여기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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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영태 소묘집 『시인의 초상』(지혜네, 1998), 240쪽.
2. 274~275쪽 「누군가의 시 한 편」 제46회.
3. 소릉이 두보의 호이니 '소릉조'는 '두보 풍으로'쯤의 뜻일 듯하다. 다만 대부분의 문헌들은 소릉의 한자를 小陵이 아니라 少陵으로 적고 있다. 시인은 아마도 두보 생애 중 가장 기구했던 동곡同谷 피난 시절의 비통한 노래들-「건원중 우거동곡현 작가 7수乾元中遇居同谷縣作歌七首」-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김사인(시인)의 해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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