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남원 「그렇다고 굳이」

by 답설재 2010. 1. 5.

그렇다고 굳이

 

 

박남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욕정에 이끌려 하룻밤을 잤다.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래도 무언가 진지함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해서

땀 흘리는 정사가 막 끝났을 때, 우리는

인간의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가끔 내 스스로에게 돌아오기는 했다.

가끔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긴 했다.

그때마다 흔들리며 바람이 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울지는 않았다.

 

 

 

"인간의 꿈과 희망"을 기억하는 70년대적 영혼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이 창궐한 욕망과 욕정의 시간에, 촌스럽게도?

읽기에 따라 시 속의 "하룻밤"은 모든 타락한 세속적 삶의 은유로도 읽힌다. 희망과 이상의 서사를 놓친 뒤에도 나날은 누추하게 이어지고, 욕정은 부끄러움도 없이 꽃피고, 그 욕됨을 수락하는 것은 또한 눈물겨운 일이지만, 그러나 이렇게밖에는 길이 없는가 싶어 어쩔 수 없이 쓸쓸해지는 것이고. "그렇다고 굳이 울지는 않"는 것이고, 그 울지 않음이 그러나 통곡보다 더 아파 보여서, 덮어둔 저마다의 순정의 한 끝을 저 마지막 행은 쓰디쓰게 울린다.

섭섭하리만큼 일체의 '시'스러운 허세가 생략되어 있다. 마치 시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다만 검박한 일상어법이 어느 마음의 외로운 애씀을 받들고 있을 따름. 한데 이 깊고 무거운 울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진실함과 성실함의 시적 형식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김사인(시인)

 

 

 

『현대문학』 2009년 11월호, 282~283쪽(「누군가의 시 한 편」 제47회). 김사인 시인이 박남원 시인의 시집 『캄캄한 지상』(2005, 문학과경계)에서 뽑은 시.

 

 

 

어떤 사랑초

 

 

 

누가 속물로 살아가고 싶을까요? 드러내놓고 돈, 명예, 권력, 그런 것에 대한 집착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도 사기, 배신, 멸시, 명령, 지배, 억압, 자만 같은 걸로 살아가고 싶을까요?

 

우리에게도 잠 못 이루던 쓸쓸한 밤과 적막한 첫새벽이 숱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진정성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밤을 새운 아침에는 매번 다시 어제의 그 욕망으로 가득한 하루 하루를 보냈는데…….

'바람이 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울지는 않았다'?

울기는……

그렇게 살아놓고,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의 그 삶을 떳떳한 것이었다고 우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사람들도 '인간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에 관한 무용담을 펼치고 화려한 자서전으로 꾸미는데…….

시인에게는 그 소박함마저도 가슴아프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