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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고영민 「앵 두」

by 답설재 2010. 1. 11.

            앵 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깨끗한 솜씨와 감각이다. 시 쓰기 시험이 있다면 모범답안 가운데서 빠질 리 없을 것이다. “둥글고 빨간 화이바”의 그녀 얘기가 ‘앵두’란 두 음절의 제목에 받쳐져 산뜻한 균형과 더불어 아연 생기롭다. ‘앵두’ 쪽에서도 마찬가지. “빨간 화이바”의 그녀와 나란히 놓임으로써 예기치 않은 쪽으로 이미지의 확장을 이룩한다. “가랑이를 오므리고”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같은 대목은 얼마나 적절하고 맛있는 구절인가.

면 소재지쯤에는 대개 다방이 하나둘 있고, 그곳에는 고향과 이름이 분명찮은 처자들이 또 하나둘쯤 있어 이륜차로 커피배달을 한다. 잔과 보온병을 야물게 보자기에 싸고 탱탱한 청바지를 입고 입술과 손톱을 빨갛게 칠하고 간다. (영화에서는 대개 껌도 같이 씹는다!) 대서소와 이발소는 물론 부면장실 우체국 노인회 사무실에도 간다. 그들이 앵두다. 삭막한 시골이 그들로 해서 그나마 홍조를 띤다.

나는 자꾸만 시 속의 ‘그녀’를 커피배달 나가는 읍내 다방 처녀쯤으로 읽고 싶다. 이렇다 할 근거도 없다.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같은 구절은 차라리 젊은 여교사에게나 걸맞을 느낌이겠고, 더구나 시의 정갈한 호흡으로 보건대 ‘나’는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다방 처녀가 커피배달을 오게 할 성싶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젊은 애인이라거나 남편 대신 배달 온 슈퍼의 젊은 새댁이라거나 해서는, 무엇보다 ‘앵두’의 저 당돌한 뉘앙스에 위배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소재지 다방 미스 아무개’가 맞다고 우기려 한다. (아무려나 외간 여성을 두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도 의젖찮은 노릇, ‘그녀’를 다만 ‘그녀’로 두는 게 예의이기는 하겠다.)

  50년대의 가요「앵두나무 처녀」이래로 앵두나무는 우물가에 있고, 우물가는 젊은 동네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앵두의 작고 빨간 보석 안에 서린 기운은, 수수한 듯 맹랑하고 도발적이다. 그것으로 해서 온 동네가 부푼다. 앵두의 둥근 빨강을 떠올리니, 다시 철없는 시절인듯 마음이 설렌다.

                                                                                                                          -김사인(시인)

 

 

『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누군가의 시 한 편」(제48회)에 나온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2009, 창비)에서 시인 김사인이 뽑은 시.

 

 

 

나에게도 '앵두'가 있었다.

누추한 풀밭이 된 그 '마당'에 어느 날 돌연 '앵두'가 나타나 앵두 같은 몸놀림으로 나를 놀려주고 앵두 같은 미소, 앵두 같은 대화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 몸놀림은 커녕 그 미소 그 대화조차 사실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어서 스쿠터처럼 생소한 앵두였다. 내 눈에 그 앵두가 보였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앵두'는 있었고 그 '앵두'에 비하면 우리는 웬만하면 늘 누추한 사람일 뿐이다.    (2010.1.11)

                                                                                                                 

 

 

저 앵두 같은 여인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그린 "바닷가의 아가씨들" 중의 한 명쯤이었을까?

 

이 젊은 아가씨들이 한결같이 미녀 친구들로만 동아리를 짠 것은 아마도 인생에 있어서의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아가씨들은 아마도 (그 태도로 보아 대담하고 변덕스럽고 매서운 성미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우스꽝스러운 것과 못생긴 것에는 극도로 민감하면서도, 지적이거나 정신적인 차원의 매력 같은 것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지라 또래의 친구들 중에서 생각이 많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나머지 소심하거나 답답하거나 서투른 면, 다시 말해서 이 아가씨들이 필시 '밥맛 떨어지게 하는 타입'이라고 말할, 그런 성격을 드러내는 아가씨들에게라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껴 그들을 멀리 따돌릴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한편 그와 반대로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유연함과 우아함이 한데 섞인 어떤 모습 때문에 자기들의 마음을 당기는 다른 아가씨들에게는 거기에 끌려 친해지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들은 그런 모습으로가 아니고서는 어떤 매력적인 성격의 솔직함,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가 없는 거이었다. 또한 아마도, 나로서는 명확하게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아가씨들이 속하고 있는 계급이 현재 도달한 진화의 단계는, 부와 여가에 힘입어, 또한 어떤 서민층에게까지 퍼져 있는 스포츠의 새로운 습관, 아직 지적인 수련이 추가되지 않은 체인 육체적 수련의 습관에 힘입어, 한 사회계층이, 아직 지나치게 꾸며낸 표현을 모색하지는 않는, 조화롭고도 풍요로운 조각의 유파들처럼, 아름다운 다리, 늘씬한 허리, 건강하고도 편안한 얼굴, 민첩하고도 명민한 표정을 갖춘 아름다운 육체들을 자연스럽게 얼마든지 생산해내는 그런 단계였다. 그러니 내가 바다를 배경으로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의 바닷가에서 햇빛을 환하게 받고 있는 조각상들처럼, 인체미의 고귀하고도 고요한 모델들이 아니던가?

 

                                                 마르셀 프루스트(김화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현대문학』 2010.5월호, 연재 제17회, 192~193쪽에서)

                                                                                                                                                                (201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