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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수영 「눈」

by 답설재 2009. 10. 24.

 

 

   

『거대한 뿌리』(김수영 시선, 민음사, 1997, 개정판 4쇄)를 꺼내어 「눈」을 찾았습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마흔일곱에 버스에 치여 죽은 詩人 김수영(1921~1968)은, 웬 일일까요, 자꾸 가슴을 앓다가 죽은 시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새벽에 본 하얀 눈 위에 기침을 하다가 나온 가래를 뱉을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마음놓고’.

쿨룩쿨룩 하다가 다시 ‘마음놓고’.

그러면 눈은 그 시인을 다 이해하고 다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 詩는 그 시는 아닙니다. 다시 차례를 열어서 다른 「눈」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저 뒤에 있었습니다. 십 년 전쯤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은 훨씬 앞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변명을 하기는 싫지만 아마 그 즈음 저는 매우 바빴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봤다 해도 무심코 넘겼을 것입니다.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이 詩가 바로 그 詩입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멋진 시집으로 일찍이 유명해진 그 최영미 시인이 이렇게 설명한 시입니다. “평생 이런 시 하나 쓸까 말까 한 그런 시다. 노력한다고, 공부한다고 써지는 시가 아니다. 김수영이 천재임을 보여주는 시다.”1

어차피 시간은 가고, 함께 세월도 가고 있으므로 저 단풍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올겨울 어느 눈 오는 날을 기다려 한번 확인이나 해보겠습니다.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리는 모습.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리는 모습.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리는 모습.

 

그리고 당연히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간간히 이런 생각도 하게 될 것입니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최영미 시인이 김수영 시인을 왜 '천재'라고 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리는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리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생각해보고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생각해보는,

내리는 날의 그런 정서쯤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지만,

그 평범한 정서를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 김수영뿐이다,

그러므로 김수영 시인은 천재다,

 

최영미 시인은 그걸 설명한 것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주제넘지만,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시를 써낸 분을 누가 '천재'라고 부른다면 사람들이 '왜 천재라고 하지?'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진짜 천재구나!' 하고 인정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 내리는 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1. 조선일보, 2009. 10. 24, A16면「잠깐! 이 저자 ≪내가 사랑하는 시≫ 최영미 시인」.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