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8

김사람 「인공 우주 광시곡」 인공 우주 광시곡  김사람  눈을 뜨니 한 세계가 멸망했다이유는 몰랐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노력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고밤이 낮보다 환했다 이전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세계가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처음 보는 새가 익숙한 음률로 울었다 인기척 찾아 산책을 했다바다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일렁이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나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기에우리는 이름과 노래를 잊었다 별이 사치스러운 밤이었다영원을 떠도는 바람에게소원을 빌었다 세상이 망해서였는지사랑이 보잘것없어선지 눈물이 오래 멈추질 않았다 늘 젖어 있던 우리는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머문 곳을 떠날 때마다밀랍 인형들이.. 2024. 7. 2.
김복희 「요정 고기 손질하기」 요정 고기 손질하기  김복희  쌀가마니 같네이 무게가 합하면아이 여러 명 같네 여기서 나온 국물과 살로먹일 입에는 좋은 일이네 이 생각이쌀가마니의 쌀을 다 털어 먹도록떠날 기색이 없어서 뼈를 정리했지뼈에서 분리한 숨을 모았어 이게 정말 맛있는 건데너무 가벼워 금세 사라져버린다니까입김에 날아가 버린다니까 나는 숨을 죽여야 했지 강아지 망아지 송아지그 모든 부드러운 혓바닥을느꼈던 순간을 합친 것보다더 조심스럽게 숨을 거둬두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헤아렸어사람을 사랑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목회자가 되는 사람도,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고건물 아래로, 다리 아래로사람의 품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사랑이 때와 재능을 만나 사랑만 하는 사람도 있지나는 요정을 사랑해서요정 고기를 손질하나 손질할 때마다가장 .. 2024. 6. 24.
김연덕 「브로치」 브로치  김연덕  집안의 여자 어른이 갖고 있던 장신구의 이미지를 따라 살게 되는 삶은 얼마나 따뜻하고 끔찍한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안방의 직각 거울할머니는 마음 한쪽을 깊이빼앗긴 책을 읽는 것처럼그 책을 아기로 다루는 것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곤 했고 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 그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그릇그릇 안의 크고 작은 브로치들이었다 여러 색의 원석이 도금된 세찬 형태의 브로치들은 꼭 그릇 안에서 잠든 곤충처럼 보였지할머니는 외출 때를 제외하고 내성적인 그 곤충들을 잘 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에 브로치들도 종종 자기들만의 빛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 2024. 6. 13.
안중경 「노랑」 노랑  안중경  너에게 노랑을 준다.햇빛에 부서지는 생강나무 꽃그 노랑을 준다.어린 시절을 겹겹이 덮고 있는 모과의노랑을 준다.혀 위에서 가루로 녹아 흐르는 삶은 달걀의노랑을 준다.코 옆에서 입술 아래로 접혀 있던 창백한노랑을 너에게 돌려준다.매일 밤 나를 바라보던 달의 눈동자그 노랑을 준다.잠자리 꼬리에서 흘러내리던 동그란 알갱이의노랑을 준다.소나기가 그치고 난 후 하늘에 번졌던노랑을 준다.지붕의 테두리를 반듯하게 금 긋던그 노랑을 준다.흰 밥알 사이로 스며들던 시금치 된장국의그 노랑을 준다.삼각형으로 조각나던 어린 새의 울음소리그 노랑을 준다.너에게 노랑을 준다.   ............................................안중경  1972년 춘천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 .. 2024. 6. 7.
유희경 「이야기」 "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희경 그해 여름엔 참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딱따구리와 함께 보낸 장마 기간을 잊을 수 없다 빨간 머리의 딱따구리는, 적어도 내 방에서만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책장에 구멍을 내거나 구멍을 내는 소리로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나는 더러 그가 딱따구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딱따구리였다 시내 큰 서점에 가서 사 온 커다랗고 비싼 조류도감에도 한 치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딱따구리가 때론 포유류의 머리를 공격해 뇌를 파먹기도 한다는 경고를 그 책에서 읽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머무는 동안 나는 희미하고 끈질긴 두통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머리의 이쪽저쪽을 만져보면서 딱따구리.. 2024. 5. 23.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김연덕  산속에 묻혀 있던 우리 집에서 언니는 한밤중에도 비이올린을 켜곤 했다 언니 방 방문에는 검은색 니트를 입은 카라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언니가 활을 꺼내 송진을 문지를 때마다 그 지휘자 옆으로 사라져버릴까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흑백의 세계로 언니가 사랑하는 외국으로 빨려 들어갈까 무서웠다 언니 방 바깥으로는 창문과 너무 가까이 뻗어 자란 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높은음을 켤 때마다 잔가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기진한 채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할 것처럼 조금씩만 떨리곤 했다 가지 몇 개가 어둡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어린 나는 활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거칠고 고집스러운 흑백의 사랑을 느꼈다 비가 오.. 2024. 5. 15.
장정일 「月刊 臟器」 月刊 臟器  장정일  제호(題號)가 이렇다 보니 저희 잡지를 대한내과이사회나 대한개원내과의사회의 기관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또 어떤 분들은 한국장기기증협회 기관지로 오해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月刊 臟器》는 창간한 지 29년째 되는 순수 문학 잡지입니다. 아(我) 지면을 통해 시인 6789명, 수필가 533명, 소설가 67명, 평론가 21명이 등단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국 대표 시인과 중견 소설가가 즐비하죠. 그냥 해 보는 가정입니다만, 이 분들이 동시에 활동을 멈추게 되면 한국 문학은 그야말로 시체가 되죠. 이분들이야 말로 한국 문학의 심장, 폐, 간, 위, 쓸개, 신장, 비장......이니까요. 연혁이 비슷한 다른 문예지에 비해 저희 잡지가 배출한 작가의 숫자가 절.. 2024. 5. 2.
오은경 「매듭」 매듭 오은경 어제와 같은 장소에 갔는데 당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신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가 돌아갑니다 파출소를 지나면 공원이 보이고 어제는 없던 풍선 몇 개가 떠 있습니다 사이에는 하늘이 매듭을 지어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풍경 속을 가로지르는 새 떼처럼 먹고 잠들고 일어나 먼저 창문을 여는 것은 당신의 습관인데 볕이 내리쬐는 나는 무엇을 위해 눈을 감고 있던 걸까요? 낯선 풍경을 익숙하다고 느꼈던 나는 길을 잃습니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건물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구름이 변화를 거듭합니다 창문에 비친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나는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당신보다 나는 먼저 도착합니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당신에게 나는 돌아와 있습니다. .. 2024. 4. 22.
장석남 「사막」 사막 장석남 1 나를 가져 내 모래바람마저 가져 나를 가져 펼친 밤하늘 전갈의 숲 사막인 나를 가져 목마른 노래 내 마른 꽃다발을 가져 2 내가 사막이 되는 동안 사막만 한 눈으로 나를 봐 너의 노래로 귀가 삭아가는 동안 바람의 음정을 알려줘 내가 너를 갖는 동안 모래 능선으로 웃어줘 둘은 모래를 움켜서 먹고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노래로 눕는 거야 나는 너를 가져 사막이 될 거야 나는 너를 가져 바람 소리가 될 거야 ..................................... 장석남 1965년 인천 덕적도 출생. 1987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젖은 눈』『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뺨에 서.. 2024. 4. 11.
심보선 「새」 새 / 심 보 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 2024. 3. 20.
김기택 「벽 3」 1989년 봄,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은 오전 내내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내 생애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담임하고 있었고 그해 겨울 서울로 직장을 옮겨 교육행정기관에서 근무하게 되지만 그 봄에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다. 교회 사찰집사님 아들과 그 교회 목사님 아들이 함께 우리 반이 되었다. 목사님 아들은 수더분하고 정직하고 의젓하고 영리해서 저절로 사랑스러웠고, 집사님 아들은 기가 죽을까 봐 스킨십도 자주 하고 이름도 자주 불러주고 했더니 누가 보거나 말거나 걸핏하면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렇지만 자주 풀이 죽고 말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까닭을 물으면 엄마 아빠가 밤새 싸워서 아침도 못 먹고 왔다고 했다. 어느 날, 또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고함을 질러버렸다. "네 엄마 아빠 당장 학교로 오라고 해.. 2024. 3. 13.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2014 나의 어머니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몸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조금도 누르지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홀가분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1920년 머지않아 일어날 전쟁은 머지않아 일어날 전쟁은 첫 전쟁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전쟁이 일어났었다. 지난번 전쟁이 끝났을 때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뉘었다. 패전국에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승전국에서도 역시 하층 서민들은 굶주렸다. 1936/37년 '나', 살아남은 자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 그 많은 친구들을 잃고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난밤 꿈에 그 친구들이.. 2024.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