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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4

안미옥 「미래 세계」 미래 세계  안미옥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올 것이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두고두고 볼 것이다 곁에 둘 수 있는 다른 돌멩이를 찾아보기도 할 것이다 매일 깨끗하게 닦고 햇볕에 잘 말려두고 가끔은 이리저리 옮겨 다른 풍경을 보게 할 것이다 네가 작은 돌멩이라면 여긴버튼을 눌러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유리 액자 안 작은 돌멩이 나는 매일 다시 돌아와 보았다만질 수 없는 너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중력을 거슬러 있고 싶은 곳에 있겠다는 듯이 아무리 높게 뛰어올라도 어딘가 도착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시간을 찾아보겠다는 듯이 매번 같은 자세로 넘어지면서 눈사람 이야기를 읽다가 덮는다 마지막엔 다 녹을 것이므로 네가 작은 눈송이라면 곁에 있는 눈송이와 함께 뭉쳐놓을.. 2024. 12. 2.
윤동주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윤동주(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조경주 그림/만화, 신형건 엮음, 푸른책들 2016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 2024. 9. 24.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 2024. 9. 21.
이신율리 「안개의 노래」 안개의 노래​  이신율리   풀이 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안개가 태어난다멜로디와 발굽을 감춘 세계가 돋아난다​이곳은 풀밭이 뛰어다니거나발굽을 잃어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엎드린 저녁은 기도를 모르지풀밭을 덮는 폭설을 모르지​양의 기분은 묻지 않는다멀리 있는 평안을 바라봐야 하니까​양의 목소리를 닮기 위해뒤꿈치를 들고 여러 번 마른풀을 읽고 지나간다​양 너머에서 안개의 노래가 깊어진다​여럿이서 혼자가 되는 안개의 시간양 한 마리 겨우 들어갈 만큼 좁거나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곳에서출렁거리는 양 떼처럼 노래를 부른다​조금 있으면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어제 날아온 새가 다시 날아올 것이다뛰어다니던 풀밭은 풀밭으로잃어버린 발굽은 무너지지 않는 발굽으로​고요한 양은 없어흰 양이 태어나겠지​잡히지 않는 성자의 .. 2024. 9. 9.
안미린 「희소 미래 1」 「희소 미래 2」 희소 미래      1  유사 지구입니다 희소 생물입니다 심우주에서 온크리처입니다 수없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 누구였을까 우리의 집에 행성이 충돌하는 일은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희고 부드럽게맑은 우주를 흘러 다닐 뿐입니다 웃고 있을까 어젯밤 무인 우주선에눈과 입을 그려준 사람   희소 미래      2  너희는 희소 생물에게 이름을 불러준다 먼 외계에게작고 투명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복슬 눈사람 인형에게눈의 기억을 들려준다 흰 청력의눈사람 언어를 영영 알 수 없지만 너희는 눈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에미래를 주저하고 첫 발자국을 거둔다 흰 눈이 지켜지는 동안 이곳은 흰 심장과 하얀 폐를 숨긴 환한 행성이었다   ..................................... 2024. 8. 18.
나의 '詩 읽은 이야기' "현대문학" 8월호 차례를 봤더니 이런 시가 실렸다.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고명재  오징어입 버터구이김승일  알리는 말씀박연준  오종종한 슬픔유수연  시간이 없다 말한 너와 겨우 만났지만 날 싫어하는 것 같고 헤어진 후에 가슴 가득 노을이 차는 것 같을 때이    훤  포토그래프임승유  소꿉최지은  겨울에서 겨울까지  가슴을 적실 것 같은 시, 재미있을 것 같은 시, 즐거움을 줄 것 같은 시, 그래! 이런 생각도 있지 싶을 시, 지금까지 말해지지 않았던 인간의 어떤 면모를 노출했을 것 같은 시, 지난 세월을 스스로 말할 줄 모르는 나를 변명해 줄 것 같은 시... 그런 시들이겠지, 그런 기대를 가졌다.예감대로일 시가 있을 수도 있고, 단 한 편도 그렇지 않아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그건 시 자체 때문.. 2024. 8. 5.
김사람 「인공 우주 광시곡」 인공 우주 광시곡  김사람  눈을 뜨니 한 세계가 멸망했다이유는 몰랐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노력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지 않았고밤이 낮보다 환했다 이전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세계가 존재하기는 했던 걸까 처음 보는 새가 익숙한 음률로 울었다 인기척 찾아 산책을 했다바다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일렁이는 우주 같은 눈동자를무의미하게 바라보았다 그와 나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기에우리는 이름과 노래를 잊었다 별이 사치스러운 밤이었다영원을 떠도는 바람에게소원을 빌었다 세상이 망해서였는지사랑이 보잘것없어선지 눈물이 오래 멈추질 않았다 늘 젖어 있던 우리는어디든 갈 수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머문 곳을 떠날 때마다밀랍 인형들이.. 2024. 7. 2.
김복희 「요정 고기 손질하기」 요정 고기 손질하기  김복희  쌀가마니 같네이 무게가 합하면아이 여러 명 같네 여기서 나온 국물과 살로먹일 입에는 좋은 일이네 이 생각이쌀가마니의 쌀을 다 털어 먹도록떠날 기색이 없어서 뼈를 정리했지뼈에서 분리한 숨을 모았어 이게 정말 맛있는 건데너무 가벼워 금세 사라져버린다니까입김에 날아가 버린다니까 나는 숨을 죽여야 했지 강아지 망아지 송아지그 모든 부드러운 혓바닥을느꼈던 순간을 합친 것보다더 조심스럽게 숨을 거둬두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헤아렸어사람을 사랑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목회자가 되는 사람도,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고건물 아래로, 다리 아래로사람의 품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사랑이 때와 재능을 만나 사랑만 하는 사람도 있지나는 요정을 사랑해서요정 고기를 손질하나 손질할 때마다가장 .. 2024. 6. 24.
김연덕 「브로치」 브로치  김연덕  집안의 여자 어른이 갖고 있던 장신구의 이미지를 따라 살게 되는 삶은 얼마나 따뜻하고 끔찍한가 세로로 길게 늘어져 있던안방의 직각 거울할머니는 마음 한쪽을 깊이빼앗긴 책을 읽는 것처럼그 책을 아기로 다루는 것처럼 거울 앞에 앉아 있곤 했고 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 그 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그릇그릇 안의 크고 작은 브로치들이었다 여러 색의 원석이 도금된 세찬 형태의 브로치들은 꼭 그릇 안에서 잠든 곤충처럼 보였지할머니는 외출 때를 제외하고 내성적인 그 곤충들을 잘 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에 브로치들도 종종 자기들만의 빛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 2024. 6. 13.
안중경 「노랑」 노랑  안중경  너에게 노랑을 준다.햇빛에 부서지는 생강나무 꽃그 노랑을 준다.어린 시절을 겹겹이 덮고 있는 모과의노랑을 준다.혀 위에서 가루로 녹아 흐르는 삶은 달걀의노랑을 준다.코 옆에서 입술 아래로 접혀 있던 창백한노랑을 너에게 돌려준다.매일 밤 나를 바라보던 달의 눈동자그 노랑을 준다.잠자리 꼬리에서 흘러내리던 동그란 알갱이의노랑을 준다.소나기가 그치고 난 후 하늘에 번졌던노랑을 준다.지붕의 테두리를 반듯하게 금 긋던그 노랑을 준다.흰 밥알 사이로 스며들던 시금치 된장국의그 노랑을 준다.삼각형으로 조각나던 어린 새의 울음소리그 노랑을 준다.너에게 노랑을 준다.   ............................................안중경  1972년 춘천 출생. 서울대 서양화과 및 동 .. 2024. 6. 7.
유희경 「이야기」 "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조용히, 심지어 아름답게 무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희경 그해 여름엔 참 놀라운 일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딱따구리와 함께 보낸 장마 기간을 잊을 수 없다 빨간 머리의 딱따구리는, 적어도 내 방에서만큼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책장에 구멍을 내거나 구멍을 내는 소리로 나를 깨우지도 않았다 나는 더러 그가 딱따구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딱따구리였다 시내 큰 서점에 가서 사 온 커다랗고 비싼 조류도감에도 한 치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으니까 딱따구리가 때론 포유류의 머리를 공격해 뇌를 파먹기도 한다는 경고를 그 책에서 읽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머무는 동안 나는 희미하고 끈질긴 두통에 시달렸다 그럴 때마다 머리의 이쪽저쪽을 만져보면서 딱따구리.. 2024. 5. 23.
김연덕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김연덕  산속에 묻혀 있던 우리 집에서 언니는 한밤중에도 비이올린을 켜곤 했다 언니 방 방문에는 검은색 니트를 입은 카라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나는 언니가 활을 꺼내 송진을 문지를 때마다 그 지휘자 옆으로 사라져버릴까 내가 모르는 부드러운 흑백의 세계로 언니가 사랑하는 외국으로 빨려 들어갈까 무서웠다 언니 방 바깥으로는 창문과 너무 가까이 뻗어 자란 나무가 있었는데 언니가 높은음을 켤 때마다 잔가지는 이곳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기진한 채 가만히 누워 있기라도 할 것처럼 조금씩만 떨리곤 했다 가지 몇 개가 어둡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어린 나는 활 몇 개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거칠고 고집스러운 흑백의 사랑을 느꼈다 비가 오.. 2024.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