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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2

정끝별 「세상 가장 작은 뼈에게」 귓속 고막에서 달팽이관 사이 이소골을 이루는 추골, 침골, 등골이라는 가장 작은 뼈들이 가장 나중에까지 듣는다기에 들을 때 속귀의 뼈들이 움직인다기에 임종을 선고한 의사가 나가자 아직 따뜻한 엄마 겨드랑이에 손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가장 작은 엄마의 뼈들을 어루만지며 엄마 귀에 대고 말했다 엄마, 엄마가 돌아간 시간을 잘 기억할게 엄마도 잘 기억해서 그 시간에 꼭 찾아와야 해 슬픔이란 얼마나 신비로운지. 슬픔도 없다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보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들으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시를 읽고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읽으면 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현대문학』 2024년 1월호에서 이 시를 보았다(나민애, 시 격월평 「상실의 시대, .. 2024. 1. 19.
유종호 「한밤중의 소리」 한밤중의 소리 앞으로 아플 일만 남았니라 궂은 일 섭한 일 딱한 일 숨찬 일만 남았어도 견딜 만하니라 버틸 만하니라 가엾은 어멈아! 불쌍한 아범아! 현대문학 2024년 1월호에 연재되고 있는 유종호 에세이 「꿈에 대하여」에서 보았다. 저승에 간 부모와의 대화 중에는 당연히 그런 부탁도 있을 것이다. 견디고 버티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2024. 1. 16.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어젯밤에는 시청으로부터 '의외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추위나 눈에 관한 문자는 정부부처들, 서울시청, 이곳 도청, 시청 등에서 중복해서 자주 왔지만 안개 주의 문자는 처음이었다. 저녁 9시부터 내일(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 안개가 심해 가시거리가 짧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는 오늘 아침에 한 번 더 왔다. 우리 동네는 걸핏하면 맞은편 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온 안개가 무슨 거대한 짐승 모양으로 움직이며 큰길을 가로질러 서서히 이웃동네를 잡아먹는 것처럼 옮겨가곤 한다. 그게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좀 미안하기도 했다. 안개 주의 문자 메시지를 보면서 이 시를 떠올렸다. 안개가 심하거나 말거나 이젠 밤거리에 나갈 일이 없어서일까? 오래전 D시에 있을 때는 안개가 자주 끼었고 그럴 때마다 볼.. 2024. 1. 11.
황인숙 「이제는 자유?」 이제는 자유?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오네. 점점 차거워지네. 서리가 끼네. 꼬들꼬들 얼어가네. 줄이 비비 꼬이네 툭, 툭, 끊어지네. 아, 이제 전화기에서 뚝 떨어져 자유로운 수화기. 금선이 삐죽 달린 그걸 두고 그녀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네. 전화기에서 천 리 만 리 떨어진 곳도 갈 수 있다네. ―황인숙(1958~ ) 산골 집에 갑자기 폭설이 내려 발이 묶인다. 눈 내리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묘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눈이 만들어주는 자유. 두절(杜絶)이 만들어주는 자유. 그러나 이내 그 자유의 훼방꾼, 휴대폰이 울린다. 이 귀엽고 발랄하고 탱글탱글한 언어의 스프링을 얻어 타본다. '수화기에서 솔솔 찬바람이 나온다'면 이제 전화 걸어오는 이가 확연히 줄거나 아예 없어진다는 .. 2024. 1. 8.
한세정 「해변의 엽서」 해변의 엽서 한세정 여보,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올까 한여름으로 치닫는 해안 철길을 달리는 기차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차창 너머 튜브를 타고 깔깔거리는 연인들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고요한 시간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알몸의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대고 이국의 파도가 해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어 언젠가는 우리도 모래의 얼굴처럼 허물어지겠지 눈 깜짝할 사이 얼굴선이 흘러내리고 침침해진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거리다 스르륵 두 눈을 감겨주겠지 여보, 그때쯤 우린 얼굴을 할퀴고 달아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 수 있을까 시퍼렇게 질려 뒷걸음질 쳤던 가로수의 상기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아내의 주름진 입가를 털어주는 한쪽 다리가 없.. 2024. 1. 7.
베르톨트 브레히트 「민주적인 판사」 민주적인 판사 미합중국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앤젤레스 판사 앞에 이탈리아 식당 주인도 왔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몰라 시험 과정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겨우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 더 공부해서 다시 도전했으나 새 언어를 모르는 걸림돌은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 (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 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질문에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판사는 그가 마음에 들었고.. 2023. 12. 21.
이태수 「눈(雪)」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 2023. 12. 18.
류병숙(동시) 「사는 게 신나서」 사는 게 신나서 류 병 숙 아저씨네 벌통의 벌들이 〈꽃가루 뭉치자, 꽃가루 뭉치자〉 이런 표어 내걸자 거미가 소문 듣고 그물코 그물코마다 〈헛발 디뎌라, 헛발 디뎌라〉 그걸 본 노린재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노린내 풍기자, 노린내 풍기자〉 이런 표어 내걸었대 사는 게 신나서. 《아동문학평론》2023년 가을호에 실린 이 동시를 나는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2023.9.22)에서 봤다. 어떤 동시 전문가가 제목과 내용이 무슨 모스 부호처럼 동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나는 사는 게 신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생각하면서 내 나름의 댓글을 달았었다. 아~ 류병숙 시인 최고!!! 이런 시를 다 보여주다니요! 아~ 이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북한 같은 나라들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우리나라 .. 2023. 12. 10.
주용일 「꽃과 함께 식사」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움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함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꽃과 함께 식사' 고요아침, 2006 내 블로그 임시보관함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 독일 흑림에서 살고 있는 '숲지기' 님 블로그에서 복사해 온 것이 거의 확실한데 혹 모르겠다. 숲지기의 정원에도 여기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을까?.. 2023. 11. 18.
박남원 「가을 항구에서」 가을 항구에서 돌아오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들아. 어쩌면 지금쯤 바람이 된 자들아. 흰 구름이 된 자들아. 언젠가 노을이 되어 떠나간 자들아. 아니, 아니 저 수심 깊은 곳에서 끝내 아직도 살아 울고 있는 자들아. 온 세상 붉은 단풍을 몰고 온 가을 한 계절이 여기까지 찾아와 기어이 너희들 안부를 묻고 있질 않느냐.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b, 2021) 77. 시인은 이 시를 가을 내내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간절해졌습니다. 내 가을은, 시인의 블로그에서 이 시가 그대로 걸려 있는 걸 확인하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을이 갔으므로 나는 시인이 지난가을을 잘 보냈기를, 올겨울에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곳에서 늘 그렇게 지냈으므로 오래 머물기보다 서둘러 나의 .. 2023. 11. 10.
미래동시모임 《나 나왔다》 미래동시모임 《나 나왔다》 계간문예 2023 이런 세상에 동인이라니... 아니, 이런 세상이어서 더 행복하겠다. 서금복·조영수·김순영·문성란·박순영·조은희·정나래·류병숙·전지영 노란 자동차 / 조은희 도로 주행 연습하는 노란 차 뒤를 트럭 버스 자동차가 갑니다 오리 떼처럼 졸졸 따라 갑니다 외길 따라 서두름도 속도도 늦추며 따라 갑니다 노란 자동차 걸음마를 따라 갑니다 이 동시를 읽으며 솔직히 양심에 찔렸다. 이젠 정말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동요 작곡 하는 누가 이 동시에 곡을 붙이면 우리의 자동차 운전 문화가 청량음료를 마실 때처럼 기분 좋게 발전하지 않을까 싶었다. '과수원길' 노래를 들으면 과수원 주인은 아카시아 등 여러 가지 꽃무리 속에서만 살아가지 싶었던 것처럼. 이런 동시 40편이 실렸다. .. 2023. 10. 24.
천양희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생각하다 천양희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時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트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2023.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