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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8

이태수 「눈(雪)」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 2023. 12. 18.
류병숙(동시) 「사는 게 신나서」 사는 게 신나서 류 병 숙 아저씨네 벌통의 벌들이 〈꽃가루 뭉치자, 꽃가루 뭉치자〉 이런 표어 내걸자 거미가 소문 듣고 그물코 그물코마다 〈헛발 디뎌라, 헛발 디뎌라〉 그걸 본 노린재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노린내 풍기자, 노린내 풍기자〉 이런 표어 내걸었대 사는 게 신나서. 《아동문학평론》2023년 가을호에 실린 이 동시를 나는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2023.9.22)에서 봤다. 어떤 동시 전문가가 제목과 내용이 무슨 모스 부호처럼 동떨어져 있다고 했는데 나는 사는 게 신난다는 건 이런 거구나 생각하면서 내 나름의 댓글을 달았었다. 아~ 류병숙 시인 최고!!! 이런 시를 다 보여주다니요! 아~ 이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북한 같은 나라들 아이들에게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우리나라 .. 2023. 12. 10.
주용일 「꽃과 함께 식사」 꽃과 함께 식사 / 주용일 ​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꺾어왔다 그 여자를 꺾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움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글고 노란 꽃판도 보라색 꽃이파리도 맑아서 눈부시다 꽃이 식탁에 앉고서부터 나의 식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외로움으로 날카로워진 송곳니를 함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꽃과 함께 식사' 고요아침, 2006 내 블로그 임시보관함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 독일 흑림에서 살고 있는 '숲지기' 님 블로그에서 복사해 온 것이 거의 확실한데 혹 모르겠다. 숲지기의 정원에도 여기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을까?.. 2023. 11. 18.
박남원 「가을 항구에서」 가을 항구에서 돌아오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들아. 어쩌면 지금쯤 바람이 된 자들아. 흰 구름이 된 자들아. 언젠가 노을이 되어 떠나간 자들아. 아니, 아니 저 수심 깊은 곳에서 끝내 아직도 살아 울고 있는 자들아. 온 세상 붉은 단풍을 몰고 온 가을 한 계절이 여기까지 찾아와 기어이 너희들 안부를 묻고 있질 않느냐.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b, 2021) 77. 시인은 이 시를 가을 내내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간절해졌습니다. 내 가을은, 시인의 블로그에서 이 시가 그대로 걸려 있는 걸 확인하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을이 갔으므로 나는 시인이 지난가을을 잘 보냈기를, 올겨울에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곳에서 늘 그렇게 지냈으므로 오래 머물기보다 서둘러 나의 .. 2023. 11. 10.
미래동시모임 《나 나왔다》 미래동시모임 《나 나왔다》 계간문예 2023 이런 세상에 동인이라니... 아니, 이런 세상이어서 더 행복하겠다. 서금복·조영수·김순영·문성란·박순영·조은희·정나래·류병숙·전지영 노란 자동차 / 조은희 도로 주행 연습하는 노란 차 뒤를 트럭 버스 자동차가 갑니다 오리 떼처럼 졸졸 따라 갑니다 외길 따라 서두름도 속도도 늦추며 따라 갑니다 노란 자동차 걸음마를 따라 갑니다 이 동시를 읽으며 솔직히 양심에 찔렸다. 이젠 정말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 동요 작곡 하는 누가 이 동시에 곡을 붙이면 우리의 자동차 운전 문화가 청량음료를 마실 때처럼 기분 좋게 발전하지 않을까 싶었다. '과수원길' 노래를 들으면 과수원 주인은 아카시아 등 여러 가지 꽃무리 속에서만 살아가지 싶었던 것처럼. 이런 동시 40편이 실렸다. .. 2023. 10. 24.
천양희 「아침에 생각하다」 아침에 생각하다 천양희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時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트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2023. 10. 22.
김개미 「토끼 따위」 토끼 따위 김개미 어느 날 집에 가니 토끼가 있었다 아버지가 쳐놓은 철망 안에서 풀을 먹고 있었다 두 귀를 세우고 앉은 토끼는 빨간 눈알로 풀을 쏘아보며 쉬지 않고 풀을 먹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자리를 옮기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분명 책에서 만난 토끼는 달리기도 잘하고 늘어지게 낮잠도 자는 빠르고 태평한 강한 토끼였는데 우리 집 토끼는 너무 약해 보여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큰 집을 짓고 산대도 텃밭 앞에 토끼장 따위는 절대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토끼를 기르면 토끼 때문에 언제가 되든 반드시 한 번은 토끼처럼 마음을 다치게 되니까 내가 동물을 기른다면 토끼보다 작고 토끼보다 영악한 동물을 기르고 싶었다 내게 속하는 것이 당하는 것보다 내가 당하는 게 나으니까 쉽게 죽.. 2023. 10. 11.
이신율리 「국화 봉고프러포즈」 국화 봉고프러포즈 이신율리 ​ ​ 마드리드 산히네스에서 추로스를 먹던 아침, 터키석 하늘에 태엽을 감았지 몇 바퀴를 돌렸으면 팝콘이 터졌을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까 끈적이는 생각에서 발을 빼면 어두워지는 한 강가야 오리 가던 길 되돌아오고 강물 소리 맞춰 봉고 돌아오고 ​ 트렁크를 활짝 열었어 풍선이 떠오르는 하늘이 넘쳐났지 그녀는 프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초코라테 셔터를 눌렀지 펄 립글로스 없이도 사진 잘 받겠다고 오늘 거울은 마음에 든다고 ​ 추로스를 먹던 아침 총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새를 보고 네가 웃었던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애드벌룬이 둥둥 떠올랐지 너는 커다란 프릴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제라늄 화분이 자꾸 시든다고 말했지 ​ 크리스마스 앵두 등을 켰어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볼륨 높였지 노란 .. 2023. 10. 5.
임승유 「세 사람」 세 사람 임승유 그녀는 모호를 알았고 모호는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던 그 모호다. 그녀는 모호가 모자 캡 들어 올리는 방법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한번은 어떻게 들어 올리는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한 번 더 해보라고 했을 때 모호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몰랐고 그냥 구운 은행을 집어 먹는 수밖에. 모호가 시를 도대체 어떻게 완성하는 겁니까 물어봐서 글쎄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데려오는 것 같아요 말했다가 우와 문장이 문장을 데려온대 그렇지 멜로디가 다음 멜로디를 데려오는 거지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이후로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모호와 내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 모호가 의자에 앉으면서 무의식중에 모자 캡을 들어 올렸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것.. 2023. 8. 16.
이희형 「플랫폼」 플랫폼 이희형 나는 우산을 들고 승강장에 서 있습니다 오늘 저녁엔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곳엔 비가 오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눈이 오고 있습니다 나는 검정 장우산을 썼습니다 그게 어른스러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천히 쌓이는 눈을 지켜보다가 전광판에 양쪽 열차가 모두 지연되고 있다는 알림이 뜬 것을 보았습니다 귓가에서 빗소리가 터지고 있습니다 반대편 승강장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갑과 목도리를 끼고 모두 누군가의 손을 잡고서 먼 곳에서 다가오는 열차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내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가오는 열차가 어느새 승강장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열차에 오릅니다 정해진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이고 열차가 사라지.. 2023. 7. 23.
박두순 「친구에게」 친구에게 박두순 친구야 너는 나에게 별이다. 하늘 마을 산자락에 망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별들 그 사이의 한 송이 별이다. 눈을 감으면 어둠의 둘레에서 돋아나는 별자리 되어 내 마음 하늘 환히 밝히는 넌 기쁠 때도 별이다. 슬플 때도 별이다. 친구야 네가 사랑스러울 땐 사랑스런 만큼 별이 돋고 네가 미울 땐 미운 만큼 별이 돋았다. 친구야 숨길수록 빛을 내는 너는 어둔 밤에 별로 떠 내가 밝아진다. ................................................................. 그 망초꽃은 어떤 모습일까. 저 중에 닮은 것이 있지 않을까. 2023. 6. 28.
'기차는 8시에 떠나네' ① 그대 귀 뒤의 카네이션 ② 도시 어린이의 꿈 ③ 우체부 ④ 5월의 어느 날 ⑤ 기차는 8시에 떠나네 ⑥ 당신이 마실 장미 향수를 주겠네 ⑦ 오토가 왕이었을 때 ⑧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오겠지 ⑨ 뱃노래 ⑩ 떠나버린 열차 ⑪ 내 마음속의 공주 오페라 『카르멘』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아그네스 발차의 CD 『조국이 내게 가르쳐준 노래』에 실린 노래들은,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내 친숙하고 편안했습니다. 그리스가 터키와 독일의 침략을 받았을 때부터 불렸다는 설명대로 우수어린 노래들이었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했다는 건 아그네스 발차의 음색이 결코 부드럽진 않은 것 같은데도 그렇게 느껴졌다는 것으로, 한동안 차를 갖고 나가게 되면 꼭 그 CD를 들었습니다. 위안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노래들을 들으면.. 2023.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