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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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잔잔해서 마음에 스며든다.
변함없이 흰색이어서 좋다.
사라질 것들이서 좋다.
사악한 사람들에게도 내리지만, 어리석은, 나약한, 정직한, 슬픈, 고독한 사람들에게도 내린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10년 전 2월(『현대문학』), 이 시를 보며 앉아 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은 사라져 갔다.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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