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엽서
한세정
여보, 우리에게도 그런 시간이 올까 한여름으로 치닫는 해안 철길을 달리는 기차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차창 너머 튜브를 타고 깔깔거리는 연인들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고요한 시간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알몸의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대고 이국의 파도가 해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어 언젠가는 우리도 모래의 얼굴처럼 허물어지겠지 눈 깜짝할 사이 얼굴선이 흘러내리고 침침해진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더듬거리다 스르륵 두 눈을 감겨주겠지
여보, 그때쯤 우린 얼굴을 할퀴고 달아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 수 있을까 시퍼렇게 질려 뒷걸음질 쳤던 가로수의 상기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아내의 주름진 입가를 털어주는 한쪽 다리가 없는 저 은발의 노인처럼
―――――――――――
한세정 1978년 서울 출생. 2008년 『현대문학』등단. 시집 『입술의 문자』.
오래전에 본 시입니다. 『현대문학』 2015년 10월호였습니다.
그때 필사해 놓았던 시들을 다시 보며 지우고 지워버리고 하는데 이 시는 여기에 올려두고 싶었습니다.
여보, 그때쯤 우린 얼굴을 할퀴고 달아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도 내밀 수 있을까 시퍼렇게 질려 뒷걸음질 쳤던 가로수의 상기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아내의 주름진 입가를 털어주는 한쪽 다리가 없는 저 은발의 노인처럼
다시 몇 해가 지났는데 먼 길을 돌아서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삶, 삶에 대한 이 누추함은 여전합니다.
별수 없다 싶고 우리 얼굴을 할퀸 사람들도 여전하고 피차 별 수 없을 텐데 여전하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딱해서 그렇습니다.
시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 | 2024.01.11 |
---|---|
황인숙 「이제는 자유?」 (0) | 2024.01.08 |
베르톨트 브레히트 「민주적인 판사」 (0) | 2023.12.21 |
이태수 「눈(雪)」 (0) | 2023.12.18 |
류병숙(동시) 「사는 게 신나서」 (22) | 2023.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