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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3

김승일 「현실의 무게」 현실의 무게 김승일 어제는 아내가 교주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부자가 돼서 함께 사는 고양이에게 뭐를 더 사주고, 자기도 회사를 때려치울 수 있을 거라고. 제 아내는 제게 뭘 해보라고 권유하는 일이 잘 없는 사람입니다. 농담으로도 뭘 해보라고 얘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걸 하면 부자가 될 것 같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떠들고. 간밤에 말한 것을 잊고, 아침에 출근하고 돌아와서 회사를 욕하고. 쉬어도 쉬어지지 않고. 뭘 먹으면 얹히고. 그러다 어제는 교주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되기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보통은 뭘 해보라고 하면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사기꾼은 되기 싫어서 바로 싫다고 했습니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건강하게 장수하면 좋겠습니다. 회사 때문에 돌아.. 2022. 6. 30.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박두순 시집 《어두운 두더지》 시선사 2022 길 -김수환 추기경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힘들고 어려운 길은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이라고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인터뷰하며 말했다. 평생 걸었지만 그길 도달하지 못했다며 쓸쓸한 표정도 슬쩍 지어보였다. 나는 이 시집의 88편의 시를 한꺼번에 읽었다. 미안했다. "시를 그렇게 읽나? 그렇게 배웠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여기저기 다시 살펴보는 사이 그런 비난이 들려오는 듯했다. 소설이나 수필 같으면 며칠 혹은 몇 달 길어봤자 대개 몇 년 만에 쓰는 것이겠지만, 시는 그렇지 않아서 수십 년간 썼을 걸 생각하면 원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그 미안함이 몰려와서 '내가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읽었지?' 싶었다. 혁명으로 .. 2022. 6. 27.
박승우「꽃피는 지하철역」 꽃피는 지하철역 박승우(1961~ ) 지하철역 이름이 꽃 이름이면 좋겠어 목련역, 개나리역, 진달래역, 라일락역, 들국화역… 꽃 이름을 붙이면 지하철역이 꽃밭 같을 거야. ‘친구야, 오늘 민들레역에서 만날래?’ 이 한마디로도 친구와 난 꽃밭에서 만나는 기분일 거야.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은 늘 꽃 이름을 부르겠지 원추리, 백일홍, 바람꽃, 금낭화, 물망초… 자주 부르다 보면 사람들도 꽃이 된 느낌일 거야. ‘이번 정차할 역은 수선화역입니다. 다음 역은 채송화역입니다’ 지하철 방송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이 송이송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겠지 사람들한테 꽃향기가 나겠지. 그새 또 8년이 지났네? 2014년 5월 14일(수) 조선일보에서 봤으니까('가슴으로 읽는 동시' 아동문학가 이준관 소개). 오월의 지하철역은 꽃 .. 2022. 6. 18.
박지혜 「초록의 검은 비」 초록의 검은 비 박지혜 그가 죽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어 온종일 울었다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보려면 이제부터 다른 문을 찾아야 한다 원을 그린다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를 기다린다 그가 침대에서 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책을 읽는다 그가 행복한 입술로 노래를 부른다 그가 착하게 밥을 먹는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가 내 어깨를 쓰다듬는다 그가 달개비꽃을 보고 소년처럼 기뻐한다 그가 걸어간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작은 종을 주었다 불안할 때마다 한 번 두 번 종을 흔들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그가 흔드는 종소리처럼 불안하다 나는 그처럼 한 번 두 번 종을 흔든다 종소리는 굳은 표정처럼 외로.. 2022. 5. 17.
정은숙「멀리 와서 울었네」 멀리 와서 울었네 지하 주차장, 신음 소리 들린다. 방음 장치가 완벽한 차창을 뚫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 그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그가 낮게 낮게 시간의 파도 속을 떠다닌다. 눈물이 거센 파도가 되고 멈춰 선 차들은 춤을 추네. 울음소리에 스며들어 점차 나는 없네. 이 차는 이제 옛날의 그 차가 아니라네. 이 차는 속으로 울어버린 것이라네. 나를 싣고서 떠나가 버렸다네. ―정은숙(1962~ )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울어본 적이 있는지. 울려고 가다가 중간에 참던 울음을 쏟아진 적이 있는지. 미처 틀어막지 못한 울음 때문에 두리번거린 적이 있는지. 누구도 오래 머물길 원치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의 문을 잠그고 .. 2022. 5. 6.
심보선 「어찌할 수 없는 소문」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다 죽음이 삶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불길한 낱말이다 나는 전전긍긍 살아간다 나의 태도는 칠흑같이 어둡다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매번 오고야 마는 것이 미래다 미래는 원숭이처럼 아무 데서나 불쑥 나타나 악수를 권한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다만 피하고 싶다 (하략) 2014년 7월 13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이렇게 딱 두 연만 소개됐고, 강은교 시인의 감상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소문인가. 존재는 없는가. 자기의 존재성이 가끔 의심되는 날, 이런 시를 읽어보자. 당신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이들, 분명 ‘그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나’는 아니다. 일터에서 ‘사람사이 터’에서 늘 오해받고 있는 나. 다시 한번 말한다.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하고 싶은 날,.. 2022. 5. 3.
강기원「코끼리」 코끼리 강기원 오늘도 그녀는 위층 남자의 소변 소리에 잠을 깬다. 새벽 여섯 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는 오늘도 건재하시다. 누런 오줌줄기가 튀어 이마를 때리는 듯하다. 아니, 그가 뿜어내는 정액을 뒤집어쓴 듯하다. 묘한 모멸감 속에 그녀는 침상에 그대로 누운 채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를 상상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긴 코를 새벽마다 사납게 휘두르는 코끼리. 어느 날 서커스장의 코끼리가 공연 도중 무대를 가로질러 도망갔다지. 의식 있는 코끼리라며 박수를 보냈었지. 추격 끝에 잡히고 만 코끼리가 위층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러고 보니 쿵쿵 울려오는 발소리마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녀는 코끼리 발밑에 깔린 채 숨 쉬고 밥 먹고 잠든 것이다. 알 .. 2022. 4. 28.
심익운(沈翼雲) 「딸을 잃고 처음 강가로 나갔다」 딸을 잃고 처음 강가로 나갔다 집의 좌우에 약초밭과 화원이 있어 어딜 가든 따라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음이 아파도 책은 펼쳐보지 않는다. 책을 말리던 그날 네가 받쳐 들던 모습이 떠올라서다. 喪兒後 初出湖上 悲悼殊甚 詩以志之 藥圃花園屋左右(약포화원옥좌우) 閑居何處不從行(한거하처불종행) 傷心未忍開書帙(상심미인개서질) 曬日他時憶爾擎(쇄일타시억이경) 영조 시대에 천재로 알려진 지산(芝山) 심익운(沈翼雲·1734~?)이 어린 딸을 잃고 썼다. 사는 집의 좌우 양편에는 약초밭도 있고 화원도 있어 한가로이 집에 머물 때면 자주 나가봤다. 그때마다 딸은 꼭 뒤따라 나와 함께 걸었다. 이제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도 약초밭이고 화원이고 가질 않는다. 그나마 아픈 마음을 잊기에는 책을 읽는 것이 좋을 텐데 그 책도 펼치.. 2022. 4. 20.
김윤식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었다」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었다 김 윤 식 몸을 포갠 저것들 떨어지지 않게 위에 있는 놈이 밑의 놈을 꽉 껴안고 있다 남의 눈을 피하려는 듯 기쁨의 소리를 죽인 채 밑의 놈이 버둥거리며 나아간다 몸을 섞어 하늘 아래 한몸을 이루는 일 참 환하고 부끄럽다 잔등에 녹황綠黃 광택을 입은 풍뎅이 두 마리가 사랑하고 있다 ――――――――――――――――――――――――――――――――――――― 김윤식 1947년 인천 출생. 1987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북어·2』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옥탑방으로 이사하다』 『길에서 잠들다』 『청어의 저녁』 2014년 7월 『현대문학』 에서 이 시를 읽을 때는 교미 중인 풍뎅이의 우스꽝스럽고 치열한 모습을.. 2022. 4. 18.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요즘 우울하십니까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문제의 동영상을 보셨습니까? 그림의 떡이십니까? 원수가 부모로 보입니까? 방화범이 될까봐 두려우십니까? 더 많은 죄의식에 시달리고 싶으십니까? 어디서 죽은 사람의 발등을 밟게 될지 불안하십니까?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십니까? 개나 소나 당신을 우습게 봅니까? 눈 밑이 실룩거리고 잇몸에서 고름이 흘러내리십니까? 밑구멍이나 귓구멍에서 연기가 흘러나오십니까? 말들이 상한 딸기처럼 문드러져 나오십니까? 양손에 떡이십니까? 건망증에 섬장증? 막막하고 갑갑하십니까? 답답하고 캄캄하십니까? 곧 미칠 것 같은데, 같기만 하십니까? 여기를 클릭 하십시오 월간『현대문학』에서 읽었습니다. 우울의 나날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 우울의 날들이 길어져서 .. 2022. 4. 15.
서효인 「교실에서」 교실에서 서효인 심심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나름의 교육적인 목표가 생길 때에 애들을 곤죽이 되게 때리던 수학 선생이 교실에 들어와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따라 웃으라 했다 좋지 않은 사람이라 어색한 명령이었는데 이해할 만한 것이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이었다 심심하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어떠한 목표도 없이 웃는 수학 선생이 어색해서 우리도 웃었다 웃으라고 하니 무서워서 웃는 아이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는 아이 숙제 검사를 하지 않을 것 같아 더 크게 웃는 아이 수학 선생의 교활한 체벌은 하루 금지되는 것일까 우리는 수학 시간을 앞둔 쉬는 시간에 모여 앉아 그에 대한 출구 조사를 해보았다 그는 야구를 좋아했다 그는 방정식을 좋아했다 그는 김대중을 좋아했다 그는 우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발언을.. 2022. 4. 10.
하종오 「아프가니스탄 아이」 아프가니스탄 아이 하종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빠 엄마 따라 한국으로 온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가을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들을 바라보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짓던 농사를 떠올려볼 것이다 탈레반이 총을 쏘고 포탄을 터뜨리며 왜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는지, 왜 가족이 다급하게 집을 떠나 비행기를 타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아이는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전쟁만 끝난다면, 전쟁만 하지 않는다면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는 생활이 좋다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몹시 걱정할 것이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빠 엄마 따라 한국으로 온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친구들을 생각할 것이다 가을볕이 따가운 날엔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다가 가을비가 내리는 날엔 숙소에서 골목길을 내다보다가 축구 골대가 있는.. 2022.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