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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63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2022. 2. 5.
동시를 읽는 이유「섭이가 지각한 이유」의 경우 내 친구 설목은 《오늘의 동시문학》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계간이니까 47호라면 대략 12년인데 그런 책을 사보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십수 년 책을 냈으니, 그것도 재단 같은 걸 만들어 어디서 보조도 받고 공사 간 찬조도 받고 하지 않고 거의 사비로 그 짓을 했으니 요즘 말론 미친 짓이었겠지요. 그러면서 2015년 봄·여름 호가 마지막이었지요, 아마? 지금은 폐간되고 인터넷 카페("오늘의 동시문학")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카페에 들어가 봅니다. 무슨 낙으로 그러는지, 평생 동시를 쓰고 읽으며 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동시)을 나는 웬만하면 "좋다"고 합니다. '좋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 2022. 1. 18.
최지은 「즐거운 일기」 즐거운 일기                                                                             최지은  11월에서 11월까지 그림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은 아무래도 슬퍼그림 그리다깜박 잠들기로 해요 당신이 꿈에 와 그간 이야기 들려주도록모른 척 잠에 빠지고 이파리 갉아 먹히듯 점점 꿈이 좁아지고잠이달아날 듯 말 듯 꿈이잊힐 듯 말 듯 당신이 떠나려는 사이에도 11월에서 11월이 가고또 다른 11월 가도록 깊은 잠 들기로 해요 눈 내리는 밤이면 나쁜 기억이 있어무서운 꿈을 꿨어요 그런 밤에도 눈을 기뻐하는 나의 늙은 개를 위해채소를 삶고 저녁을 짓고지친 마음은 그림 속에 주저앉히고무엇이든 넘치지 않도록얌전히 걸으며 그렇다 해도 12월의 끝혼자, 식은 .. 2021. 11. 19.
황순분 「코스모스」 코스모스 코스모스 아름답다.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구절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 코스모스가 반가워서 코스모스 꽃밭이 선물 같다고 썼던 자신이 한심하구나 싶었습니다. 저 한적한 길의 코스모스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저 코스모스가 순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저 시인이 그 코스모스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게 참 미안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이제 보니까 첫 문장 "코스모스 아름답다"는 평범함을 가장한 예사로움 같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2021. 11. 3.
박상수 「윤슬」 윤슬 박상수 있을게요 조금만 더 이렇게, 모래에 발을 묻어두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기 이렇게 있을게요 끝에서부터 빛은 번져오고, 양털구름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다가 지구가 둥그렇게 휘어지는 시간, 물들어오는 잔 물결, 잘게 부서진, 물의 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머리칼을 날리며 사람들은 떠나가고 아이들도 돌아가면 누가 놓고 간 오리 튜브가 손을 놓친 듯 멀리 흘러가고, 여기까지인가 봐, 그런 생각, 뭐야 그런 생각하지 마, 혼자 건네고 받아주는 농담들, 그래야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어요 지난겨울에는 졸참나무랑 벚나무 장작을 가득 태우며 앉아 있었어요 내가 나로부터 풀려나는 시간, 그때도 눈 속을 이글거리며 혼자 앉아 있었구나 글레이즈 가득 얹은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내가 .. 2021. 11. 1.
김수영 「눈」 이 파일은 가짜입니다. 미안합니다. 10년 전쯤 어느 눈 오는 날 오후,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민음사)와 최영미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시》(해냄)를 보며 이 시 감상문을 썼었는데 일전에 곧 올해의 눈이 내리겠다 싶어서 들여다보다가 뭘 잘못 만져서 그 파일을 잃었습니다. 저녁 내내 앉아 있어도 그 감상문 시작 부분은 떠오르는데 다른 부분은 제대로 기억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유난히 댓글도 많았었으므로 그것도 가슴 아팠습니다. ............................................................................................................................................................. 2021. 10. 27.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박상순 그의 걸음은 빠르고 내 걸음은 무겁다. 자루 같은 가방 두 개를 멘 그의 걸음은 빠르다. 나는 조금 힘을 내서 그의 걸음을 따라잡는다. 그의 가방 하나를 내 어깨에 걸친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시 그의 걸음을 쫓아가서 나머지 가방도 내 어깨에 걸쳐놓는다. 내 걸음은 무겁다.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둘러메거나, 등에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다. 매일 무거워져서, 이것 하나 없애고, 저것 하나 없애고 빈 손에, 텅 빈 얼굴로 기억도 덜어내고, 추억도 덜어내고, 슬픈 꾀꼬리도 지우고 웃음 짓던 진달래도 지우고, 외톨이 쇠붙이는 파묻고, 나만의 별똥별, 나만의 새벽별도 버리고, 현재는 톡톡 털어서 햇볕에 말리고, 바삭하게 말리고, 어쩌면 무척 가벼울지도.. 2021. 10. 25.
"정지용 이전과 이후" 평론가 유종호의 글은 재미있습니다. 『현대문학』에는 그의 글이 거의 상시적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어느 옛 시인을 찾아―윤태웅의 『소녀의 노래』」(2019년 7월호)에는 정지용 시인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뭘 더 이야기해봤자 그렇겠지요. "마음해본다"는 것은 마음을 동사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지용 동시에 그 사례가 보인다. '유념하다' '작심하다'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별똥 떨어진 곳 마음해두었다 다음 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소. ―「별똥」 전문 번역 시편 「물결은 조금도」에 보이는 아름다운 마음의 "부끄럼성"도 정지용의 창의성 있는 말씨로 생각된다. 정지용 시편 「따알리아」에는 "젖가슴과 부끄럼성이 / 익을 대로 익었구나"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정지용 이전과.. 2021. 9. 12.
「내 친구 밋남흥 - 라오스에서」 내 친구 밋남흥 - 라오스에서 송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밋남흥 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둘이서 손잡고 걸었다 마주보며 웃으며 함께 걸었다 땀 찬 손 얼른 닦고 손 바꿔 잡으며 우리 둘이 손잡고 함께 걸었다 '"왓쯔 유어 네임?"(?) 이게 뭐지?' 하다가 '이것 봐라?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했고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했습니다.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감꽃'이라는 분이 지난 9월 10일, 그 카페 '내가 읽은 동시' 코너에 소개한 걸 이렇게 옮겨왔습니다. -- 감꽃님, 설목님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옮겨놓았으니 당연히 지금도 그렇게 잘 있는지 확인하자 싶어서 다시 갔더니 어?.. 2021. 9. 11.
「검고 붉은 씨앗들」 검고 붉은 씨앗들 황인숙 고요한 낮이었다 "주민 여러분께 쌀국수를 나눠드립니다! 서두르세요, 서두르세요! 이제 5분, 5분 있다가 떠납니다!" 집 아래 찻길에서 짜랑짜랑 울리는 마이크 소리 나는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슬리퍼를 꿰신고 달려 내려갔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른 명 남짓 모여 있었다 가만 보니, 마이크를 든 남자가 번호를 부르면 번호표를 쥔 손을 번쩍 든 사람한테 파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비누도 주고 플라스틱 통도 줬다 어머나! 내가 눈이 반짝해서 파란 야구 모자 남자한테 번호표를 달라고 하자 그는 나를 잠깐 꼬나보더니 '에라, 인심 쓴다' 하는 얼굴로 번호표와 함께 인삼 씨앗 다섯 알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넸다 벙싯벙싯 웃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에 섞.. 2021. 9. 6.
《매달린 낙서》 조은희 동시집 《매달린 낙서》 소야 2021 코스모스 핀 가을 강변을 함께 수놓는 고추잠자리 이야기 같은 건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런 장면을 떠올려 노래하던 동시인들이 보면 충격을 받겠구나, 머썩하겠구나 싶었다. 순전히 삶에 관한 '이야기'다. 가짜 엄마 진짜 엄마 농사일로 엄마는 너무 바쁘다 거의 밖에 있다 집에 와도 일만 한다 하루 종일 엄마를 일에게 빼앗겼다 가짜 엄마. 잠자리에 누워야만 다정한 엄마 목소리가 찾아오고 토닥이는 손길이 찾아온다 밤에 비로소 진짜 엄마가 옆에 와 있다. 이 아이가 진짜 '진짜 엄마'만 좋아하겠나? '가짜 엄마'라고 싫어하겠나? 그렇게 일만 하면서 아이를 여럿 낳은 뒤 얼른 저승으로 가버린, 오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나의 그 '가짜 엄마'가 떠올랐다. 빨간 오토바.. 2021. 8. 29.
황유원 「아르보 패르트 센터」 아르보 패르트 센터 황유원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센터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 2021.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