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
박상수
있을게요 조금만 더 이렇게, 모래에 발을 묻어두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기 이렇게 있을게요 끝에서부터 빛은 번져오고, 양털구름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다가 지구가 둥그렇게 휘어지는 시간, 물들어오는 잔 물결, 잘게 부서진, 물의 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머리칼을 날리며 사람들은 떠나가고 아이들도 돌아가면 누가 놓고 간 오리 튜브가 손을 놓친 듯 멀리 흘러가고, 여기까지인가 봐, 그런 생각, 뭐야 그런 생각하지 마, 혼자 건네고 받아주는 농담들, 그래야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어요 지난겨울에는 졸참나무랑 벚나무 장작을 가득 태우며 앉아 있었어요 내가 나로부터 풀려나는 시간, 그때도 눈 속을 이글거리며 혼자 앉아 있었구나 글레이즈 가득 얹은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내가 바라는 가장 고요한 자세로, 내게 쌓인 농담과 내게 버려진 가혹이 다른 누구에게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힘을 다하여 그렇게, 그래도 결국은 있었구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있다는 것은 내가 뭐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나는 그런 곳을 떠돌고 있어요 그런 곳을 만들어나가고 있어요 파라솔 플라스틱 테이블 위 스파클링 사과주스 한 병을 놓아두고 모래를 툭툭 건드리며 그냥 이렇게, 저녁은 다 와버려서 하늘이 뒤바뀌고, 감춰진 창문 하나가 더 열린 것처럼 바람과 이슬이 쏟아져 내리는 바다, 잘게 부서진, 물의 결, 손을 내밀면 짙은 홍매화 군락으로부터 백작약 수풀을 통과하여 나는 물들고 있어요, 온통 쓰라리게 흔들리고, 흩어진 채 빛을 담으며, 해변의 끝자락에 아직 있어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가 여기 조금 살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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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동서문학』 등단.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숙녀의 기분』『오늘 같이 있어』. 〈김종삼문학상〉 등 수상.
"여기까지인가 봐"
"여기 조금 살아 있어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해서 한 번 더 읽었어.
그리고 한 번 더
또 한 번 더......
'윤슬?'
사전에서 찾아봤어.
'좋은 말이네?'
'윤슬'을 떠올리며 다시 읽었어.
느낌이 달라졌어.
그래서 다시 읽었어.
'윤슬 이전'의 느낌을 되살려보려고
불가능한 일이었어.
어쩔 수 없지.
'윤슬'의 의미와 함께 읽기로 했어.
삶이 잔치 같다는 이야기라면 시가 있어야 하겠니.
"온통 쓰라리게 흔들리고, 흩어진 채 빛을 담으며, 해변의 끝자락에 아직 있어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가 여기 조금 살아 있어요"라는 시인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게 미덥지 않니.
(『현대문학』 202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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