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박상순
그의 걸음은 빠르고
내 걸음은 무겁다.
자루 같은 가방 두 개를 멘 그의 걸음은 빠르다.
나는 조금 힘을 내서 그의 걸음을 따라잡는다.
그의 가방 하나를 내 어깨에 걸친다.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시 그의 걸음을 쫓아가서
나머지 가방도 내 어깨에 걸쳐놓는다.
내 걸음은 무겁다.
손에 들거나, 어깨에 둘러메거나, 등에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다.
매일 무거워져서, 이것 하나 없애고, 저것 하나 없애고
빈 손에, 텅 빈 얼굴로
기억도 덜어내고, 추억도 덜어내고, 슬픈 꾀꼬리도 지우고
웃음 짓던 진달래도 지우고, 외톨이 쇠붙이는 파묻고,
나만의 별똥별, 나만의 새벽별도 버리고, 현재는 톡톡
털어서 햇볕에 말리고, 바삭하게 말리고, 어쩌면 무척
가벼울지도 모른다는 미래 또한
쳐다보지도 않는데
(......)
오늘, 내 걸음은 왼쪽에 있다. 왼편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 목소리를 오른쪽 그림자 안으로 밀어 넣는다.
오늘도, 내 목소리는 무겁다. 너무 무거워도 내 힘으로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겨우 몇 걸음 걷기라도 하면
내 안에서, 바다, 수평선, 내가 가보지 못한 먼 대륙의 축제,
이제 서른넷이 되었다는 어떤 여가수의 가느다란 생애,
이비인후과 의사, 곤충학자, 헝가리에서 온 발레리나,
지난달 독일로 갔다는 바이올린 연주자,
1984년에 사망한 스코틀랜드의 트럼펫 연주자,
러시아에서 파리로 간 예쁜 누드 천사, 예카테리나
어떤 초등학교 운동장, 그리고 코스타리카의 훌리아......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들을 내 안에서 낮은음으로
천천히 책 읽듯이, 노래 부르듯이
한 마디씩 이어가며 그런 곡조나 이야기를 담은 잠들을,
내 몸속에 쌓아놓는다.
밤마다 나는 그것들마저 덜어내려고 애쓴다.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고, 엎어졌다, 일어서고
다시 왼쪽으로 구르고, 오른쪽으로 구르고
(......)
앞서던 그가 택시를 탄다.
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그도
택시 안으로 들어온다.
택시는, 가볍고 빠르게 광장을 벗어난다.
걷지 않아도 무겁다. 내 목소리가 또
오늘의 짐 하나를 나의 심장 왼편에 들여놓는다.
예쁜 누드 천사 예카테리나가 오늘 저녁에
파티를 열 모양이다.
택시에서 내린 그의 걸음은 여전히 빠르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그의 걸음 또한 느리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잠시 걷기를 중단한다.
앞서 가던 그의 뒷모습도 이제 지웠다.
꾀꼬리도 지우고, 진달래도 지우고
저녁해도 지웠다.
(......)
손끝으로 소리를 듣는다.
손끝에서, 소리의 떨림이
나를 타고 올라왔다가, 등줄기를 타고 다시 내려간다.
나의 낯선 목소리가 또 무엇인가 짐짝 하나를
텅 빈 얼굴인 나에게 선물하려나 보다. 선물!?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gagio』『슬픈 감자 200그램』『밤이, 밤이, 밤이』 등. 〈현대문학상〉〈현대시작품상〉〈미당문학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21년 8월호.
내 걸음도 무겁다.
박상순 시인을 따라 걸으며
그가 열거하는 것들을 다 주어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가 가득 차면 그 순서대로 가슴속으로 옮겨놓고 싶다.
무거운 걸음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인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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