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밋남흥 - 라오스에서
송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선미. 왓쯔 유어 네임?
마이 네임 이즈 밋남흥
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서 둘이서
손잡고 걸었다
마주보며 웃으며
함께 걸었다
땀 찬 손 얼른 닦고 손 바꿔 잡으며
우리 둘이 손잡고
함께 걸었다
'"왓쯔 유어 네임?"(?) 이게 뭐지?' 하다가
'이것 봐라?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했고
'나도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했습니다.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감꽃'이라는 분이 지난 9월 10일, 그 카페 '내가 읽은 동시' 코너에 소개한 걸 이렇게 옮겨왔습니다.
-- 감꽃님, 설목님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옮겨놓았으니 당연히 지금도 그렇게 잘 있는지 확인하자 싶어서 다시 갔더니 어? [토론]이 동시(시) 어때요?라는 코너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아우야!
멋집니다!
정말 그렇다 싶고, 다음엔 나도 그래야지 싶습니다.
하기야 이름을 알았으니 다른 건 당장은 그리 절실하지도 않겠지요.
그러면 된 것이고 저렇게 걸어가다 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요.
내가 그렇게 댓글을 달아놓은 아래에 동시계의 전문가 두 분은 아주 혹평을 해 놓은 걸 봤습니다.
"시는 허리를 꺾어 만든 화환을 두른 장식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진정성이라는 등뼈를 내보이는 겁니다."라고.
또 한 전문가는 "어린이라고 그렇게 간단히 친구가 되는 건 아닙니다. 억지 포장된 친구 같습니다."라고.
그걸 카페 주인 설목이 보시고 "내가 읽은 동시" 코너에 있던 것을 "[토론] 이 동시(시) 어때요?"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글에 진정성이 없다면 그건 글도 아니죠. 맞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동시에 진정성이 없을까요?
아이들이 그렇게 간단히 친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글쎄요.
글에 대해서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문학의 성격이 그런 것이라면, 교육에서는 문학에서보다 백 배는 더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글을 읽은 생각이 똑같은 사회는 사회도 아니니까요.
글을 읽은 소감을 한결같게 하려는, 자연스러운 일인 척하지만 인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사람은 결코 교육자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저 동시에서처럼 저렇게 하면 친구맺기가 너무 경솔한 건가요?
글쎄요.
한평생 함께하고 있는 사람도 첫눈에 반했잖아요.
1, 2초 만에 그렇게 된다잖아요.
전문가들이 그렇게 혹평을 하니까 나는 저 동시가 더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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