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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황유원 「아르보 패르트 센터」

by 답설재 2021. 8. 20.

 

 

 

아르보 패르트 센터

 

 

황유원

 

 

저희 센터는 탈린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라울라스마, 바다와 소나무 숲 사이의 아름다운 천연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저희 센터를 방문하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나, 버스나 자전거 혹은 두 발을 이용해 방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센터 주차장에는 자전거 보관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탈린에서 센터까지 두 발로 걸어오는 방법입니다. 35킬로미터가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는 건 물론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멀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은 음악이 가까이 손 닿을 데에 있어서 그것을 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종소리는 또 어떻습니까. 종소리는 늘 사라짐의 장르여서 사랑받습니다.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그러니 사라지기 위해서라면 35킬로미터로도 한참 부족할 테지만 우선은 그 정도로 시작해 몸을 푸는 게 좋겠지요.

 

먼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보니 최근에 제가 겪은 일이 떠오르는군요. 최근에 외국에서 친구 한 명을 사귀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저는 그 친구와 iMessage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편하고 다행한 일이지만, 저는 때때로 휴대폰이 원망스럽습니다. 편지지에 천천히 길게 오랫동안 써야 마땅할 문장들이 휴대폰 화면에 조각조각 부서진 채 흩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시대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요. 저는 iMessage를 감사하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메시지 창 위에 적히는 우리의 문장들이 소나무 숲처럼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끊이지 않는 한, 이 숲은 자라고 또 자라, 언젠가 그 안에 저희 센터 같은 건물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고도요.

 

잠깐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저희 센터 홍보 글이 되어버렸네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늘 멀리 가야 본질적으로 만족하는 부류이며, 멀리 가는 방법은 눈 먹던 토끼 얼음 먹던 토끼가 제각각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떠드는 동안, 저는 벌써 센터를 떠나 소나무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숲으로 들어온 겨울 햇빛이 독서등처럼 켜져 있군요. 이런 독서등 아래서라면 뭘 읽어도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읽고, 잠시 소나무 뿌리 베고 잠들어도 좋겠습니다. 그럼 숲이 제 잠에 그려진 악보를 천천히 읽어보겠죠.

 

누구나 물을 마시듯이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타불라 라사 Tabula Rasa」리허설 첫날 때 연주자들은 음표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악보를 보고는 "음악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었었다죠. 휴대폰은 잠시 꺼두겠습니다. 당분간 당신을 찾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사라지려면 우선 멀어야 하고, 멀어지려면 아무것도 휴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요. 음악을 듣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 볼륨은 제로가 적당합니다.

 

 

* Arvo Pärt Centre 홈페이지의 Location에 적힌 글.

** 비킹구르 올라프손 Vikingur Olaf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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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 〈김수영문학상〉 수상.

 

 

 

이런 시 같으면 어떤 노래일까 생각했습니다.

노래가 아닙니까? 그럼 음악이겠지요, 그러니까 이런 시는 어떤 음악인가요?

이런 노래를 들으며 지내고 싶습니다.

시험 문제 출제하는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디 이런 시를 출제해서 학생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싶습니다.

(가령, 이 시에서 '님'은 무엇을 비유한 단어인가? 그런 문제...)

부탁합니다. 함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기를...

 

 

『현대문학』 202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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