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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특선 다큐멘터리」

by 답설재 2021. 8. 14.

이 나비 부부가 길바닥에 누운 것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걸 찍었는데 이렇게 보입니다.

 

 

특선 다큐멘터리

 

 

이소호

 

 

나는 전기장판 위에서 낮잠만 자는 수사자 한 마리를 혐오했다. 그깟 수염 좀 많은 게 뭐 대수라고 매 끼니마다 소 돼지를 해 다 먹였다 버는 것 없이 쓸 줄만 알았던 남편은 부른 배를 부여잡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생로병사의 비밀」의 볼륨을 높여가며, 오래오래 사는 법을 강구했다 여보 내일은 가젤 데신 뱀을 잡는 게 좋겠어 그게 그렇게 정력에 좋다더구먼 밤일도 사냥도 못 하는 남편 저 혼자 평화로웠다 한편 오늘도 골방의 토끼 새끼들은 글로버만 주워 먹으며 배고픔에 허덕였다 사계절 내내 양푼에 클로버를 비벼 먹다가 빨개진 눈을 부비며 물었다 엄마 우리에게 행운은 언제 오나요 아버지가 좋은 이파리만 골라 먹어버렸단다 토끼 새끼들은 눈이 더욱더 빨개졌다 풀독에 오른 자식새끼들은 점점 매가리 없이 픽픽 쓰러졌다 얘들아 여긴 약육강식의 세계란다 약한 사람은 당해도 싼 곳이야 그러니까 늘 몸집을 부풀려야 한단다 잊지 마 얘들아 집에서도 누군가가 늘 너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 아빠가 저래 보여도 이 동네의 왕이란다 암사자만 몇 명을 거느리고 있는 줄 아니? 그러니까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시면 꼭 공손하게 인사하고 천천히 들어가렴 빨리 움직이면 괜히 우리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줄 알고 우리를 잡으려 드실 거란다 그 뒤는 말 안 해도 알지? 엄마 하지만 엄마 말은 거짓말이에요 아빠는 호시탐탐 우리를 잡아먹으려 드는걸요 매번 입맛을 쩝쩝 다시며 앞발을 세워 이리 굴려 저리 굴려보시는걸요 아시잖아요 엄마. 엄마도 도망 말고는 살 방법이 없다는 걸요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보렴 아빠가 제일 먼저 태어났으니 그래도 먼저 죽지 않겠니? 우리 죽은 듯이 기다려 보자꾸나 원래 죽은 것은 건들지 않는 법이란다 하루가 갔다 또 하루가 갔다 하루를 이어 붙인 하루는 또 갔다 엄마 엄마 보세요 역시 가는 데는 순서가 없나 봐요 틀렸어요 우린 다 틀렸어요 목덜미를 이미 들켰는걸요 토끼 새끼들은 일제히 모두 눈을 감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알아서 가장 좋은 부위를 모아 모두 남편에게 주었다 여보, 여보 일어나봐요 그래도 우리 어떻게든 살아야 하잖아요 돌아누운 등 아래 남편은 손가락만 까닥일 뿐. 아랫도리는 여전히 꼼짝도 안 했다 부녀회에서도 발톱을 세워 허벅지 긁는 법을 이번 주 안건으로 내세웠다 그래 초식동물에게도 발톱은 있다 발톱은 날카롭다 발톱은 은밀하다 발톱은 날카롭고 은밀하고 더럽다 그러니까 발톱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가젤의 속을 파던 그 손으로 바지 속을 박박 긁었다 벅벅 소리가 날 때마다 자지러지게 헐떡헐떡 숨조차 몰아쉬는 법밖에는 몰랐던, 전기장판 속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말했다 야 이 무식한 여편네야 텔레비전에서 못 봤어? 남들 다 하는 그깟 살림 좀 한다고 나대지 마 수사자는 사냥 따위는 하지 않는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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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1988년 서울 출생. 2014년 『현대시』 등단. 시집『캣콜링』『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 〈김수영문학상〉수상.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읽고 통쾌해하면서 '이런 사람 더러 있지' 하다가 슬며시 이거 내 얘기를 해놓은 건 아닐까 싶어지더니 이제 자꾸 불편한 느낌입니다.

 

『현대문학』 2021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