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매달린 낙서》

by 답설재 2021. 8. 29.

조은희 동시집 《매달린 낙서》

소야 2021

 

 

 

 

 

 

코스모스 핀 가을 강변을 함께 수놓는 고추잠자리 이야기 같은 건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그런 장면을 떠올려 노래하던 동시인들이 보면 충격을 받겠구나, 머썩하겠구나 싶었다.

순전히 삶에 관한 '이야기'다.

 

 

가짜 엄마 진짜 엄마

 

 

농사일로 엄마는 너무 바쁘다

거의 밖에 있다

집에 와도 일만 한다

 

하루 종일

엄마를 일에게 빼앗겼다

가짜 엄마.

 

잠자리에 누워야만

다정한 엄마 목소리가 찾아오고

토닥이는 손길이 찾아온다

 

밤에 비로소

진짜 엄마가

옆에 와 있다.

 

 

이 아이가 진짜 '진짜 엄마'만 좋아하겠나? '가짜 엄마'라고 싫어하겠나?

그렇게 일만 하면서 아이를 여럿 낳은 뒤 얼른 저승으로 가버린, 오십 년 전 마지막으로 본 나의 그 '가짜 엄마'가 떠올랐다.

 

 

빨간 오토바이

 

 

빨간 오토바이를 보면

집배원이었던 아빠 오토바이가

부릉, 달려나온다

 

편지, 소포들로 가득찼던

아빠 오토바이 우편함이 비워질 땐

시골 사람들이 고맙다

참외, 수박 담아 주었지.

 

아빠는 하늘나라에서도

'편지요' 하며 배달하실까?

 

하얀 눈이 내린다

아빠가 배달하는

하늘나라 편지 같다

 

나는 머리에 앉은 눈을

하나도 털지 않았다.

 

 

동시를 외면하는, 동요 부르는 걸 차라리 쑥스러워하며 어른들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요즘 아이들이 이런 시를 읽으면 다시 동시를 찾게 될 것 같다.

그 아이들에게 "시처럼 살라" 하면 '우스운 소리 하네' 하겠지만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 같다.

이런 시들은 세상을 시로써 보는 아이들을 위한 시가 될 수 있겠구나 싶다.

 

나는 교사 시절에 아이들이 사회 사상(事象)을 바로 이런 시처럼 보도록,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세상이 워낙 완고해서 실패를 거듭했다.

교과서에 들어 있는 내용을 일일이 따져보고 다른 관점으로도 생각하는 아이들이 되게 하고 싶었는데 '고매한' 교육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게 하고 시험 문제도 절대로 그렇게는 내지 않는 세상이어서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을 외우는 것이어서 넌더리가 났었다.

 

 

팔자걸음

 

 

창덕궁 뒤뜰에

놓여 있는 징검돌들

팔자걸음 모양이다

 

에헴, 길을 비켜라

옛날에 잘난 척 거드름 피우며

걸었다던 양반들의 팔자걸음.

 

징검돌 따라 걸어보니

몸이 비틀비틀

퍽 불편하다

 

양반들은 왜 이렇게

불편한 팔자걸음을 좋아했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그때

구름도 희뜩희뜩

새들도 깔깔

강아지도 따라다니며 웃었겠지.

 

 

이 시인은 꺼내놓기가 좀 껄끄러운 것들까지 '이야기'로 바꾸어놓는다.

 

 

성이 둘

 

 

내 짝은 성이 둘

'문주영'이었는데

'박주영'으로 바뀌었다

 

잊고 "문주영" 불렀더니

들은 척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가끔 "문주영" 부르면

대답하지 않던 주영이.

 

어느 날, "문주영" 불렀는데

"왜" 대답했다

깜박 잊고 또 "문주영" 불렀더니

화내지 않고 "응" 대답했다.

 

떠난 주영이 아빠는

'문주영' 안에서

주영이 손을 놓을 수 없나 보다.

 

 

이런 얘기는 돌아서서 수군거리지? 이런 얘기가 시가 되는 건 시인이 이렇게, 밝게 긍정적인 눈으로 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가 할머니가 되면 이야기를 잘 해주는 '그리운 옛날식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시가 부럽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간'이 부럽다.

이런 시인이라면 뭘 바라보기만 하면 시는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아니어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시인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몽당연필이 많아요

 

 

글씨 쓰기 힘들어하는 지연이

뚝,

힘 조절을 못해

뚝,

자꾸 부러진다

 

지연이 연필은

키가 금방 작아져서

필통에

키가 작은 연필이 많다

 

지연이는

그래도 연필이

자기 일 또박또박 했다고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는다.

 

 

고장난 핸드폰

 

 

핸드폰이 갑자기 노래를 했다

끄려고 허둥대는데

노래를 크게 작게 계속 불러댔다

선생님 눈초리는 매섭고

아이들이 다 쳐다봐

전원을 마구 눌러 겨우 껐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핸드폰이 더 이상 켜지지 않는다

아, 노래 좋아하는 나에게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들려주려고

말려도 그렇게 막무가내였구나.

 

핸드폰의 마지막 인사가

노래였다.

 

 

질투를 할 동시인이 있겠지? '어떻게 이런 시들을 썼지?'

뻔한 일이니까 내가 답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살아야 그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알지만..."(그 동시인)

"더 알고 싶으면 이 시집 뒤의 '시 해설(박두순)'을 찾아보시든지요..."(나)

 

"내가 써놓고 내가 신기해합니다."

"즐겁고도 맛있게 읽히는 동시를 많이 쓰고 싶습니다. 이 바람은 내가 간직해야 할 간절한 지침서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말이 미덥다.

 

'어? 외국어고등학교 학생이 그림을 그렸어? 하루이틀에 그릴 수는 없었을 텐데...'

재판(再版)을 내게 되면 표지에 "조은희 동시, 오현주 그림"이라고, 현주 님 이름을 더 드러내주어도 좋겠다. 그러면 현주 님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더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