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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검고 붉은 씨앗들」

by 답설재 2021. 9. 6.

검고 붉은 씨앗들

 

 

황인숙

 

 

고요한 낮이었다

"주민 여러분께

쌀국수를 나눠드립니다!

서두르세요, 서두르세요!

이제 5분, 5분 있다가 떠납니다!"

집 아래 찻길에서

짜랑짜랑 울리는 마이크 소리

나는 막 잠에서 깬 부스스한 얼굴로

슬리퍼를 꿰신고 달려 내려갔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른 명 남짓 모여 있었다

가만 보니, 마이크를 든 남자가 번호를 부르면

번호표를 쥔 손을 번쩍 든 사람한테

파란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비누도 주고 플라스틱 통도 줬다

어머나! 내가 눈이 반짝해서

파란 야구 모자 남자한테 번호표를 달라고 하자

그는 나를 잠깐 꼬나보더니

'에라, 인심 쓴다' 하는 얼굴로 번호표와 함께

인삼 씨앗 다섯 알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넸다

벙싯벙싯 웃고 있는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에 섞여서

나는 벙싯벙싯 두근두근하다가

특별 할인가로 홍삼 세트를 받게 된 할아버지가

파란 야구 모자 남자한테 어디론가 이끌려 가며

어정쩡히 걷는 뒷모습을 일별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발을 옮겼다

 

요 희끄무레 바싹 마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인삼이 난단 말이지?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인삼 씨앗을 신기해하며

긴가민가 들여다보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때 내 책상 서랍에는 키 작은 해바라기 씨앗 봉투, 나팔꽃 씨앗 봉투,

채송화 씨앗 봉투, 금잔화 씨앗 봉투도 있었다

봉투에 인쇄된 모습으로만 내게 꽃을 보여줬던 씨앗들

그 책상은 이제 없다

씨앗들은 다 어디 갔을까

 

얼마나 많은 꽃씨들이

얼마나 많은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을까, 싹 틔우는 꿈으로

몸을 뒤척이고 있을까

 

 

 

.............................................................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경향신문』등단.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자명한 산책』『리스본 行 야간열차』『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아무 날이나 저녁때』.〈동서문학상〉〈김수영문학상〉〈형평문학상〉〈현대문학상〉수상.

 

 

 

『현대문학』 2021년 8월호.

 

 

 

2019.10.13. ..........?

 

 

 

시인의 마을엔 쌀국수, 홍삼 세트와 함께 검고 붉은 씨앗들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왔었군요^^

한때 버스만 타면 몇 명이 우루루 올라와서 순식간에 번호표를 나눠주고

앞에서 번호를 부르면 너도나도 여기 있다고 그 번호표를 높이 쳐들었는데...

그때 나는 가슴은 출렁대는데 용기는 없어서 뚫어져라 앞을 바라보며 그냥 앉아 있기만 했었습니다.

"당첨 됐는데 왜 가만 있나!"

그들 일행이 내 번호를 보면 혼이 날까봐 그 작은 번호표를 감추고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넌 번호표 안 받았냐?" 하고 따질까봐 초조했습니다.

 

그들은 허접한 물건을 나눠주고 순식간에 돈을 거두어 사라졌습니다.

비 내리는 초가을 밤에 시 때문에 옛일들이 떠올라 이러고 앉아 있습니다.

마침내 비 때문에 이러고 앉아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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