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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5

장옥관 「질문들」 질문들 장옥관 당신 없는 나날이 수국의 적설로 쌓이고 앵두가 매달렸다 지고 지고 가죽나무 새순이 뜯겨진 자리가 꾸덕꾸덕 굳어갑니다 있다가 없어진 자리 어떤 질문을 얹어놓을까요 그 탐스런 모란꽃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온다던 사람 온 적 없다는 걸 당신의 의자에 앉아 오지 않는 오후를 하염없이 반드시 오지 않아야 한다는 무논에 저절로 일다가 주저앉는 어린 벼 포기 건드리고 가는 저 속삭임. ................................................................................. 장옥관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1987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황금 연못』『바퀴소리를 듣는다』『하늘 우물』『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 2021. 3. 15.
「풀 잡기」 풀 잡기 / 박성우(1971~ ) 올해만큼은 풀을 잡아보겠다고 풀을 몬다 고추밭 파밭 가장자리로, 도라지밭 녹차밭 가장자리로 풀을 몬다 호미자루든 괭이자루든 낫자루든 잡히는 대로 들고 몬다 살살 살살살살 몰고 싹싹 싹싹싹싹 몬다 팔 다리 어깨 허리 무릎, 온몸이 쑤시게 틈날 때마다 몬다 봄부터 이짝저짝 몰리던 풀이 여름이 되면서, 되레 나를 몬다 풀을 잡기는커녕 되레 풀한테 몰린 나는 고추밭 파밭 도라지밭 녹차밭 뒷마당까지도 풀에게 깡그리 내주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낮잠이나 몬다 10년이 다 되어 간다. 장석남 시인이 소개한 이 시를 보고* 고성에서 농사를 짓는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를 생각했다. 그분이 블로그 《현강재》에 실어놓은 "잡초와의 전쟁"이 생각난 것이다. 잡초와의 전쟁 작은 규모이지만 농.. 2021. 3. 9.
내 제자의「궤도 이탈」 내 제자가 궤도 이탈을 했습니다. 경황 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수술을 하다가 동맥이 끊어져서 피를 많이 흘렸고 기억과 지능도 저하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십 년 전, 우리 교실 맨 앞자리에서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던 초등학교 1학년 그 아이, 어째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는 사정이 늘 안타까웠는데, 아이 아버지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기억력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영상통화를 해달라고 간절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연전에는 내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했고 간간히 통화도 했지만 나에 대한 기억이 삭제되어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누구시죠?"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듯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바로 "선생님~" 했고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도 해서 '별 일 아.. 2021. 3. 3.
「버스를 타고 나에게로」 버스를 타고 나에게로 노춘기 그런 날,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너와 떨어져 앉아 한참을 말없이 가야만 했던 그런 날 가령 극장에 나란한 자리가 없어서 곁을 잃고 두 시간 동안 묵묵해져서 눈을 돌려 바라보면 너는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네가 이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내가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았던가 내내 불안해져서 그런 날, 돌아오는 버스에 나란히 서 있을 자리도 없어서 너와 다른 쪽 창을 향한 손잡이를 붙들고 흔들려야 해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밀려 너에게서 한 발 더 멀어지고 아득히 물끄러미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빼곡한 옆얼굴들 사이 틈틈이 너무 멀어진 네 표정을 지켜보면서 알게 되었겠지 너도 나에게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던 걸 영원히 혼자 서 있게 된다는 사실을 문득 눈이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 2021. 2. 19.
유혜빈 「카페 산 다미아노」 카페 산 다미아노 유혜빈 영원에게 말한 적 있다 시월 마지막 날 정동에 다녀오자고 돌담길 지나 있는 카페 바깥에 앉아나 있자고 커피나 대충 시켜놓고 휴지에 아무 글자나 끄적이고 있자고...... 아니 가본 건 아니고요 가을에 꼭 가봐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데요...... 이름이 산 다미아노...... 라는데요...... 그는 기어코 잊어버리자고 만든 약속을 기억해낸다 나는 당황스럽게 풍족해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영원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영원과 상관없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우린 눈 감을 때마다 걷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생겨났다 조금 멀리 왔구나 알게 되면 영원은 돌아가야 할 것이다 걸어온 길을 따.. 2021. 2. 10.
조영수 「눈 내린 아침」 눈 내린 아침 조영수 지워졌다 깨끗한그리운기다리던보고싶은 솜털같은백설기같은솜사탕같은 꾸밈말들 다 지워지고 와!만 남았다. 미래동시모임동인지 《지구를 꺼 볼까》(2020, 아동문예) 어제는 정말 많이도 내렸습니다. 오후에는 구름처럼 일어나서 몇 굽이 산자락을 가볍게 넘어가 버리는 무서운 눈보라도 보았습니다. 다 요절낼 것 같았는데...... 시인은 새벽에 일어나 세상을 덮은 눈을 보신 것 같습니다. 깨끗한 그리운 기다리던 보고 싶은 솜털 같은 백설기 같은 솜사탕 같은...... 그런 말 다 지워(치워) 버리고 와! 하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나도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첫새벽 저 눈 같은 사람...... 2021. 1. 19.
「소」 내 친구 雪木 박두순 시인이 시 '소'를 선물했습니다. '소 해'(소년)여서 그랬는지, 이 블로그에 써놓고 갔습니다. 이중섭 화가가 생각났는데 서울미술관에서 본 황소는 화가 난 것 같아서 이중섭 화가네 가족을 태우고 가는 정다운 소를 여기에 옮겨놓았습니다. 이제 雪木의 그 시입니다. 소 박두순 큰 입을 가지고도 물지 않는다 큰 눈으로 보기만 한다. 2021. 1. 7.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박상순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이른 아침 나뭇잎, 한낮의 붉은 잎, 저녁 담장, 밤 계단, 어둠의 손잡이, 그런 사람들을 품은 기계를 뜯어냈다. 아침 나뭇잎은 내 피부를 벗겼고, 한낮의 붉은 잎은 제 머리 위에 나를 거꾸로 올려놓았고, 저녁의 담장은 물속에 나를 빠뜨렸고, 밤의 계단은 내 발목을 잡았고, 어둠의 손잡이는 울었다.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방을, 무지개, 구름 귀신, 달 귀신, 웃음 귀신, 아기 귀신, 뿔뿔이 흩어지며, 물방울, 무지개......를 노래하는 아이들을 낳는 기계를 뜯어냈다. 밑판을 뜯어냈다. 이른 아침 나뭇잎이었던, 한낮의 붉은 잎이었던, 저녁 담장이었던, 밤 계단이었던, 어둠의 손잡이였던 기계. 나 또한, 아침 나뭇잎의 피부를 벗겼고, 내 머리 위에 한낮.. 2021. 1. 4.
김현 「그뿐」 그뿐 김현 눈사람을 둥글게 만드는 법은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수아야 너는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노란 은행잎을 올려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났구나 네가 옳다 이 순간 먼 훗날 부모도 순진무구하여 슬픔의 눈보라에 휩싸이고 너는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두겠지 가지 않은 길 눈물의 초입은 언제나 맑고 빛나 녹아내려 부모를 인도할 거란다 더 깊고 어두운 심금으로 한 송이 연꽃을 피우도록 수아야 부모 알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게도 슬픔이 커서 기쁨의 부츠 속에서 발을 빼야 할 날이 올 테니까 그건 또 부모에게 얼마나 큰 환희겠느냐 맨발로 눈밭을 걷기로 작정한 자식새끼 앞길에 등불을 들고 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은 어느새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사실 인간은 가벼이 살아간다 가끔 눈송이를 혀 위에 .. 2020. 11. 23.
남진우 「헨젤과 그레텔」 헨젤과 그레텔 남진우 숲으로 가는 길엔 늘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는 덤불들이 숲을 에워싸고 저 높이 야윈 달 뒤에서 간혹 여우가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다시는 못 올 길을 더듬어가면서 소년과 소녀는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멀리 숲 한가운데 붉고 노란 빵과 과자로 만들어진 집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밀가루와 설탕 크림과 캐러멜로 이루어진 둥근 오두막 한가운데 늙은 마녀는 물레를 돌리고 돌아가는 물레 따라 훈훈한 모카 시나몬 레몬 향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숨죽이고 바라보던 소년과 소녀는 벽과 문 계단과 유리창 이윽고 찬장과 식탁 욕조와 침대까지 뜯어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달빛까지 사라진 숲의 빈터엔 덩그렇게 남아 물레를 돌리는 마녀 한 사람뿐. 소년과 소녀는 트림.. 2020. 10. 23.
김미선 「닻을 내린 그 후」 닻을 내린 그 후 김미선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고 세월 넘겨 찾아뵈오니 아버지 풀 속에 누워 씨를 뿌리고 계시더라 뫼풀들과 소곤소곤 얘기하시느라 본척만척 하시더라 이생의 모든 업 다 풀고 풀 되어 바람하고도 한 몸이 되어 춤추고 계시더라 못내 섭섭하여 모퉁이 돌아서서 훌쩍거렸지만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더라 소복소복한 뫼풀 울타리 안겨 꽃과 나비도 부르고 계시더라 이 시인은 최근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시인의 블로그에 가봤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시간여행 생이 오고 가는 시간 사이에 슬픔 기쁨 행복 누리는 안락함이 비바람 구름 폭풍을 만나면 엎어지거나 자빠지거나 넘어지거나 미끄러져 찍힌 상처도 모두 내가 밟고 지나왔거나 지나가는 길 많은 실수와 잘못함으로 .. 2020. 9. 29.
우정임 「지구를 꺼 볼까」 지구를 꺼 볼까 우정임 지구를 잠시 꺼 두고 싶어. 맨 먼저 골치 아픈 학교 드르릉 코를 골게 달달 볶던 학원도 잠에 빠지게 밤늦게 불빛 새어나오는 회사빌딩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도 달콤한 꿈을 꿀 수 있게. 우린 그랬지 '피곤해' 말 못하고 쉬고 싶어도, 놀고 싶어도 말 못했지. 공부하기 싫고 머리 복잡할 때 지구를 잠시 꺼두고 싶다. 미래동시모임동인지 《지구를 꺼 볼까》(2020)에서. .......................................................................................... 우정임 1955년 태어남. 2009년 《오늘의 동시문학》 등단. 동시부문 신인상 수상. 2012년 서울문화재단창작지원금 받아 2013년 동시집 「.. 2020. 9.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