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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현 「그뿐」

by 답설재 2020. 11. 23.

 

 

 

 

그뿐

 

 

김현

 

 

눈사람을 둥글게 만드는 법은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수아야

너는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노란 은행잎을

올려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났구나

네가 옳다

이 순간 먼 훗날

부모도 순진무구하여

슬픔의 눈보라에 휩싸이고

너는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두겠지

가지 않은 길

눈물의 초입은 언제나 맑고

빛나

녹아내려 부모를 인도할 거란다

더 깊고 어두운 심금으로

한 송이 연꽃을 피우도록

수아야 부모 알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네게도 슬픔이 커서

기쁨의 부츠 속에서 발을 빼야 할 날이 올 테니까

그건 또 부모에게 얼마나 큰 환희겠느냐

맨발로 눈밭을 걷기로 작정한

자식새끼 앞길에 등불을 들고 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은 어느새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사실

인간은 가벼이 살아간다

가끔 눈송이를 혀 위에 올려놓으면서

까불면서 알 수 없으면서 복받치면서 모르쇠로

수아야

눈이 녹으면 사람들은

다시 눈을 기다린단다 인생은

그뿐

축하해, 너의 세 번째 눈사람

 

 

           《현대문학》2020년 6월호

 

 

김 현 1980년 강원도 철원 출생. 2009년『작가세계』등단. 시집『글로리홀』『입술을 열면』. 〈김준성문학상〉〈신동엽문학상〉수상.

 

 

 

(...)

맨발로 눈밭을 걷기로 작정한

자식새끼 앞길에 등불을 들고 선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은 어느새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사실

인간은 가벼이 살아간다

(...)

 

 

'맨발로 눈밭을 걷기로 작정한'

'인간은 가벼이 살아간다'

 

그래!

정말 그래!

 

그런데도 그런 나를 인정해주질 않는다.

인정해주고 싶지 않겠지?

인정해다오! 제발 인정해다오!

 

'부모와 자식은 어느새 / 백지장 한 장 차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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