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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by 답설재 2021. 1. 4.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박상순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이른 아침 나뭇잎, 한낮의 붉은 잎, 저녁 담장, 밤 계단, 어둠의 손잡이,

그런 사람들을 품은

기계를 뜯어냈다.

 

아침 나뭇잎은 내 피부를 벗겼고, 한낮의 붉은 잎은 제 머리 위에 나를 거꾸로 올려놓았고, 저녁의 담장은 물속에 나를 빠뜨렸고, 밤의 계단은 내 발목을 잡았고, 어둠의 손잡이는 울었다.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방을, 무지개, 구름 귀신, 달 귀신, 웃음 귀신, 아기 귀신,

뿔뿔이 흩어지며, 물방울, 무지개......를 노래하는 아이들을 낳는

기계를 뜯어냈다.

 

밑판을 뜯어냈다. 이른 아침 나뭇잎이었던, 한낮의 붉은 잎이었던, 저녁 담장이었던, 밤 계단이었던, 어둠의 손잡이였던 기계.

 

나 또한, 아침 나뭇잎의 피부를 벗겼고, 내 머리 위에 한낮의 붉은 잎을 올렸고, 물속에 저녁 담장을 빠뜨렸고, 밤의 계단을 무너뜨렸다, 어둠의 손잡이는 울었다.

 

노래하는 아이들은 달려 나가

멀어지고, 멀어지고.

기계는 낱낱이 분해되어

아침 나뭇잎은 쇠붙이가 되고,

한낮의 붉은 잎은 작은 동그라미가 되고,

저녁 담장은 한 점이 되고,

밤 계단은 흰 줄이 되고.

 

물방울, 무지개,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이른 아침 나뭇잎, 한낮의 붉은 잎, 저녁 담장, 밤 계단, 어둠의 손잡이.

여기까지 밀고 온

기계를 뜯어냈다.

 

―그런데 여기에도, 첫눈이 오시네요, 글쎄.

 

 

 

.............................................................................

박상순  1991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Love Adagio』『6은 나무 7은 돌고래』『슬픈 감자 200그램』『밤이, 밤이, 밤이』 등. 〈현대문학상〉〈현대시작품상〉〈미당문학상〉 등.

 

 

 

『現代文學』 2021년 1월호 200~201.

 

 

 

 

 

 

 

아, 우리가 노래하는 아이를 낳는, 그런 사람들을 품은 기계를 뜯어내다니! 그럼 어떻게 하나.

여기까지 밀고 온 기계(!)를 뜯어내다니...... 여기까지나 와서.

문득! 첫눈이 오신다. 여기 이땅에. 아! 좋은 세상...... 기대를 가져도 될 것 같은.

 

 

아름답다. 노래 같다. 쉽다. 기다렸던 시. 기다려지는 박상순 시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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