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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6

이신율리 「콜록콜록 사월」 콜록콜록 사월 이신율리 배꽃이 질 때까지 나는, 사월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발이 작은 운동화는 팔지 않았다 참외에서 망고 냄새가 났다 사월이 콜록거렸다 푸른 것은 더 푸른 것끼리 속아 넘어가고 흰 것은 흰 것끼리 모였다 배꽃 같은 나이를 뒤적거렸다 달아나지 않으려고 네 칸짜리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하루가 갔다 하늘은 내일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배꽃의 잔소리가 4차선 도로까지 따라왔다 노래하나 물고 새가 날아갔다 잃어버린 가사가 둥둥 떠다녔다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지나갔다 초록 티셔츠를 입은 울창한 숲이 아무도 모르게 헛발질을 했다 떫고 신 것들이 툭툭 나이만큼 떨어졌다 열다섯 살에 잠갔던 배꽃이 먼 쪽에서부터 피기 시작했다 구름 뒤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는 숲을 찾고 있었다 .. 2020. 5. 12.
한 늙은이 「헌화가獻花歌」 철지난 꽃을 보며 지나가다가 국어 선생님이 낭독해 주시던 '헌화가'가 생각났습니다. 짙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나오는, 수로부인 이야기입니다. 성덕왕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할 때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높이가 천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는 이것을 보고 가까이 모시던 이들에게 청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종자들은 대답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고는 모두 안 되겠다 했다. 그 곁으로 한 늙은이가 암소를 .. 2020. 5. 9.
정우신 「不二門 ― 건봉사의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 不二門 ―건봉사의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 정우신 선생은 절을 마치고 관으로 돌아가 누웠다 향이 끝나갈 때쯤 살냄새가 났다 불이 꺼진 적이 없던 가마솥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삼동내 개들은 장작 연기의 방향에 따라 짖었다 산 중턱까지 뻗어나가지 못하는 차가운 울음소리 눈을 감으면 몇 가지 안 보이고 몇 가지 더 보였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새끼를 낳고 찾아가지 않았다 나는 미닫이 창을 달고 선생의 나비를 기다렸다 ―――――――――――――――――――――――――――――― 정우신 1984년 인천 출생. 2016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비금속 소년』 『현대문학』 2020년 4월호 206~207. 누구와 이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이내 응해 줄지…… 어느 시인 사진을 보고 가물가물해졌던 사람의 눈빛을.. 2020. 5. 1.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최승자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7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피어나는 꽃 피면서 지고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부는 바람 늘 쓸쓸할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지금 내리는 비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며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 2011년 겨울에 시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보았고, 2016년 초여름 이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4년만에 시집을 구입한 것인데 「빈 배처럼 텅 비어」가 맨 앞에 있고, 그 다음에 「하루나 이틀 뒤에 죽음이 오리니」가 있었습니다. 이 시인은, 이 시를 보면, 삶과 죽음에 관하여 바짝 다가앉아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마.. 2020. 4. 21.
이기철 「꽃나무 아래 책보를 깔아주었다」 꽃나무 아래 책보를 깔아주었다 이기철 겨울 창고 문고리를 따면 가득한 봄이 쏟아져 나온다 냉이꽃 주소 한 장 들고 꽃동네를 찾아간다 오전의 뺨에 연지를 찍어주고 싶던 시간과 꿈꾸는 딸기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싶던 날들을 데리고 간다 단추처럼 만지던 모음의 헌사들과 지나고 나면 허언이 되고 말 낙화와의 언약도 담아서 간다 그에게 치마 한 벌 바느질해 입히고 홀로 황홀했던 봄날과 홈질도 박음질도 서툰 내 반짇고리에 날아와 담기는 꽃잎의 말도 보듬고 간다 저 분홍들에게 눈 맞추는 일밖엔, 체온 밴 내복을 빨아 너는 일밖엔 내가 할 일은 없어, 하루만 더 머물다 가라는 말밖엔 전할 안부는 없어 다시 올 삼백예순 날 기다려 나는 피부가 하얀 꽃나무 아래 헌사 대신 꺠끗한 책보를 깔아주었다 ――――――――――――――.. 2020. 4. 9.
김순영 동시집《열 살짜리 벽지》 김순영 동시집 《열 살짜리 벽지》 소야주니어 2020 1 동시집을 보면(1960년대 초였지? 교과서 전성시대, 내가 생전에 동시집 같은 걸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생각난다. 나중에 교육부 편수관이 되어 교과서를 만들고 심사하고 관리할 때는 괜히 옆자리의 국어 편수관들을 미워했다. '꼴에 국어 편수관이라고?' 내가 국어 교과를 맡지 못하고 다른 교과를 맡아서 약이 올랐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 같으면 이 시를 교과서에 실을 텐데…….' 꽃 식당 봄이 차린 향긋한 식당 꽃잎 간판 내걸었다 풀밭에 민들레 식당 담장 높이 목련 식당 큰길 옆 개나리 식당. 꽃 식당마다 손님 끌기 한창 '꿀' '꽃가루' 차림표 붙여 놓고 벌 나비가 종일.. 2020. 3. 28.
찰스 부코스키 《창작 수업》 찰스 부코스키 《창작 수업》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9 나는 찰스 부코스키(등장인물 : 헨리 치나스키)가 폭로해버린 아버지 유형에 가까운 아버지라는 얘기를 써버렸으니까 그가 다른 시에서는 아버지를 또 어떻게 표현해 놓았는지 여기에 옮겨 놓고 싶었습니다. 이제 와서 나 자신에게 무슨 복수 같은 걸 하고 싶다기보다는 '폭로'쯤으로 해석하면 적당할 것입니다. 실제로 부코스키(치나스키)처럼 그렇게 하는 자식들이 없지도 않습니다. (…) "한심한 인간." 어머니는 말하고 나서 일어나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여자도 하나 끼어 있네." 어머니가 말했다. "꼭 남자처럼 생겼어." "거트루드*예요." 나는 말했다. "근육 자랑하는 남자도 있구나." 어.. 2020. 3. 27.
찰스 부코스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HOW TO BE A GREAT WRITER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6 난 내가 죽을 때 누가 우는 거 별로야, 그냥 처분 절차나 밞아, 난 한세상 잘 살았어, 혹여한가락 하는 인간이 있었다고 해도, 나한텐못 당해, 난 예닐곱 명분의 인생을 살았거든, 누구에게도뒤지지 않아.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아, 그러니 추도사는 하지 마, 제발,정 하고 싶으면 그는 경마 도박을 했고대단한 꾼이었다고 해 줘. 속표지의 이 시(「잊어버려 forget it」) 원문을 찾아보았다. "자, 들어봐,"로 시작되고, "다음 차례는 당신이야, 당신이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거든,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로 끝난다. 여러 작품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욕을 .. 2020. 3. 17.
박상순 「그녀의 외로운 엉덩이」 하얀 석판 하나가 트라클의 시를 품고 벽에 붙어 있었다. 「미라벨의 음악Musik im Mirabell」이다.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하얀 이방인 하나가 집으로 들어선다. 개 한 마리가 낡은 복도를 내달린다. 하녀는 등불을 끄고, 귀는 밤에 소나타 음악을 듣는다. (…) 내 앞의 그녀1는 온통 흰색이었다. 따뜻한 흰색, 동그렇게 흰색, 요동치는 바다를 건너온 나의 울트라마린보다 반 뼘쯤 키가 큰 흰색,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그리지 못한다. 말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스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별했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찰츠부르크, 인스부르크로 들어갔던 2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의.. 2020. 2. 18.
찰스 부코스키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찰스 부코스키《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LOVE IS A DOG FROM HELL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6 탈출 검은 과부 거미*한테서 탈출하기란 예술에 버금가는 대단한 기적. 그녀는 거미줄로 당신을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기분 내킬 때 죽일 거야 당신을 품에 안고 피를 쪽쪽 빨아서. 내가 검은 과부한테서 탈출한 건 그녀의 거미줄 안에 수컷들이 많아서였어 그녀가 한 놈을 품다가 다른 놈을 품고 또 다른 놈을 품는 사이 나는 애써 속박을 풀고 빠져나와 전에 있던 데로 갔지. 그녀는 내가 그리울 거야 내 사랑이 아니라 내 피 맛이. 그래도 멋진 여자니까 다른 피를 찾아내겠지. 꽤 멋진 여자야, 죽음도 불사하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뿐이야. 나는 탈출했어. 다른 거미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군. 이야기가.. 2020. 2. 11.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찰스 부코스키 Charles Bukowski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THE LAST NIGHT OF THE EARTH POEMS: HELL IS A CLOSED DOOR 황소연 옮김, 민음사 2019 연말에 시인 雪木에게 큰 실례를 한 일이 있어서 그걸 드시고 입 좀 닫아주었으면 싶어서 꿀을 사 보냈는데 한동안 아무 말이 없어서 '통했구나!' 생각하는 사이 느닷없이 날아온 우편물을 펴보았더니 '엇?' 이 시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배를 곯을 때는 지옥은 닫힌 문이다 가끔 문 열쇠 구멍으로 그 너머가 얼핏 보이는. 젊든 늙었든, 선량하든 악하든 작가만큼 서서히 힘겹게 죽어 가는 것은 없다. 속표지에 적힌 이 시(「지옥은 닫힌 문이다」 부분)부터 읽어보고 나는 다시 雪木을 생.. 2020. 1. 7.
임지은 「대충 천사」 대충 천사 임지은 천사가 있다면 자르다 만 핫케이크에 누워 있을 텐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해서 나만 안다 천사는 대충을 좋아한다 대충 싼 가방을 메고 피크닉 가는 것을 몇 개의 단어로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천사는 모든 것이 대충인 세계로 온 것 좋아해서 그어놓은 밑줄 위에 천사가 누워 있다 내가 좀 전에 벗어놓은 추리닝을 입고 있는 천사는 튀어나온 무릎만큼 상심한다 인간은 악취에 뿌린 냄새 같아서 향수로도 잘 감춰지지 않고 우리는 틀어놓은 음악을 함께 듣고 있지만 모두 자기 자신만 듣느라 천사가 곁에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나의 이어폰으로 놀러 온 천사여, 지금 그 기분을 벗지 말아요 어렵거나 힘들거나 고달프거나 짜증이 나거나 분통이 터지거나 한 날이 수도 없이 닥쳐옵니다. 그런 날에도 조용한.. 2019.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