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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박상순 「그녀의 외로운 엉덩이」

by 답설재 2020. 2. 18.

하얀 석판 하나가 트라클의 시를 품고 벽에 붙어 있었다. 「미라벨의 음악Musik im Mirabell」이다.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하얀 이방인 하나가 집으로 들어선다.

개 한 마리가 낡은 복도를 내달린다.

하녀는 등불을 끄고,

귀는 밤에 소나타 음악을 듣는다.

 

(…)

내 앞의 그녀1는 온통 흰색이었다. 따뜻한 흰색, 동그렇게 흰색, 요동치는 바다를 건너온 나의 울트라마린보다 반 뼘쯤 키가 큰 흰색, 그런데…… 더 이상 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눈빛, 그녀의 손가락 하나도 그리지 못한다. 말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인스부르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이별했다.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 찰츠부르크, 인스부르크로 들어갔던 2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의 일이다. 단지 조금 지났을 뿐이거나 겨우 조금 지났을 뿐이라고 말해야 할까. 흘러가는 시간의 정도는 너무 애매해서 가혹하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잡다한 시간 속을 쏘다니며 보았거나 지나쳤던 그 누구 또는 그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의 세계였고, 나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 나는 문자로도, 소리로도, 그녀의 모습을 옮기지 못한다. 내 기억 속에서 빛나는, 가장 아름다운 그녀의 말소리 한 점도 제대로 옮기지 못한다. 무능하고 무능하여 더없이 처참하다. 다시 형태를 연습하고 색채를 연습한다면 혹시라도, 인스부르크의 히아신스를 그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모든 낱말을 다 부수어버리면 그녀를 그릴 수 있는 언어를 새로 만들 수 있을까. 혹시나 인스부르크에 가면, 꿈속에서라도 그녀가 나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을까. 날씬한 얼굴을 꽃잎처럼 열어줄 수 있을까.

그 꽃잎의 황금빛 뒷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래도 이제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름답다는 말 또한 깨진 이마를 감싼 채 산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가야 한다. 도시는 눈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나의 인스부르크. 사라진 기억을 위해서도, 새로운 색채나 낱말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출발은 늘 햇빛과 함께 동심원을 그린다. 시작도 재생도 그 어느 에너지도 아니다. 그린 것들 사이를 스치며 사라질 뿐이다.

(…)

 

                    ― 박상순, 「인스부르크로 가는 길」(에세이, 『현대문학』 2020년 1월호, 42~50) 중에서.

 

 

 

 

 

 

그녀의 외로운 엉덩이

 

 

 

그녀의 엉덩이엔 아무것도 없어서
구멍을 파기도 쉽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에 구멍을 파고
오래된 먼지를 쓸어 넣는다.
그녀의 엉덩이는 더 통통한 여자의 엉덩이보다
넓어서
큰 구멍을 파고 몇 놈이든 묻을 수 있다.

 

그녀보다 더 하얀 여자의 엉덩이보다
더 매끈한 여자의 엉덩이보다
그녀의 엉덩이는 더 둥글고 깊어
양쪽에 하나씩 큰 구멍을 파기도 쉽다.

 

그녀의 엉덩이에 구멍을 파고
나는 낡은 시계와 탁자
침대와 욕조
현관문과 거울도 떼다 버린다.

 

그녀의 엉덩이엔 아무것도 없어서
구멍을 막기도 쉽다.
겨울옷과 자전거
피아노와 날벌레와
조용히 몇 놈을 더 쓸어 넣는다.

 

그녀의 엉덩이는 젊기도 해서
구멍 속에 처넣은 감자에서 싹이 트고
때로는 죽은 생선도 지느러미를 퍼덕이고
바람 빠진 자전거의 바퀴가 저절로 부풀고
부패한 몇 놈도 꿈틀거리고

 

파묻은 피아노도 띵띵거리지만
그녀의 엉덩이엔 아무것도 없어서
캄캄한 밤이면 불빛 하나 없어서
나 혼자 미끄러져 나자빠질 뿐이다.

 

 

― 박상순 시집 《밤이, 밤이, 밤이》 현대문학, 2018, 78~80.

 

 

나는 사실만 쓴다. 모든 이의 인생이 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사실은 나만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별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책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말을 만든다. 그래야 커뮤니케이션이 될 것이다. 그래야 독약 들고 산에 올라가지 않는다. 사람들 속에서 한 몸이 되어야 즐겁기도 하다. 내 책은 혼자 놓여 있으니 고독한 책이다. 그러나 춤추고 노래도 한다. 지난달엔 조금 뻑뻑하지만 바로크시대풍의 음악도 들렸다. 그렇지만 내 책은 그럴듯한 활자도 그 어떤 디자인도 없다. 그림도 색깔도 없는 책이다. 그런 건 필요 없다. 그런 것들은 내 책이 아니다. 나의 진심도 아니다. 내 책 속엔 벌거벗은 언어밖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냉정한 외면만 있다. 혹독한 고독만 있다. 그런 식의 춤, 그런 식의 노래, 그런 식의 책이다. 그렇지만 고립은 아니다. 티티가 있기 때문이다.

 

― 박상순 「보그 또는 티티」(『현대문학』 2019년 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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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 시 속의 하녀
  2. '세상에 없는 책'을 주제로 한 신년특집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