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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한 늙은이 「헌화가獻花歌」

by 답설재 2020. 5. 9.

 

 

 

철지난 꽃을 보며 지나가다가 국어 선생님이 낭독해 주시던 '헌화가'가 생각났습니다.

 

짙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다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나오는, 수로부인 이야기입니다.

 

성덕왕 때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태수(江陵太守)―지금의 명주(溟州)―로 부임할 때 바닷가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높이가 천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는 이것을 보고 가까이 모시던 이들에게 청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종자들은 대답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고는 모두 안 되겠다 했다. 그 곁으로 한 늙은이가 암소를 몰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와서는 또한 가사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일연一然『삼국유사』이재호 옮김, 솔, 231, 233).

 

학교 다닐 때는 주로 수로부인이라는 그 여인의 미모를 그려보곤 했습니다.

그 후로는? 철쭉꽃과 함께 노래를 지어 바친 그 노인을 생각했고('내가 그 늙은이었다면……'), 오늘은 강릉태수로 가고 있는 순정공이라는 인물을 주로 생각했습니다. '저 늙은이가 저 위험한 곳에 올라가 꽃을 꺾어 내 아내에게 바쳐?'

당시의 남녀관, 애정관은 지금과 많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친 그 노인처럼 늙었고(내가 더 늙었을까요? 아마 그렇겠지요?), 철쭉꽃은 그때 그대로입니다.

 

강릉 사람들은 얼마쯤 초조함과 기대감을 가지고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순정공은 부임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그곳에서 종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좀 쉬라고 하고 자신도 쉬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그 장면이 내 마음 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