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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월명 「제망매가」

by 답설재 2020. 6. 5.

 

 

 

「제망매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 이야기하면 혹 누이동생들에게 재수 없는 일이나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생사의 길'이 재수에 달린 것일까.

내 마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지막 고개를 넘은 느낌이었다.

 

얽히고설키어 살던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니까 당장 하얗게 잊혔고 함께하던 시간들 중 몇 가지가 쓸쓸한 날에만 두어 장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H 씨는 가난한 초등교사였다가 공부를 더 하고 노력해서 저명한 교수가 되었고 매우 넓은 토지도 소유했으나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다. 죽기 직전 몇 번이나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괜히 애를 썼다고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약값이 많이 든다고 가슴 아파했고, 돌아갈 때 작은 물건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다.

 

K 씨는 권위를 자랑하는 학자였다. 나는 학자가 아니면서도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기가 싫었다. 마침내 기회가 와서 그가 전국적인 강연장에서 우리나라 교사들은 정책에 비해 그 능력이 빈약해서 정책이 자동차 E라면 운전사(교사)는 자동차 T에 지나지 않는 꼴이라고 비난했는데(그는 내가 추진하는 정책을 존중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면박을 주는 토론을 했고(우리나라는 정책이 엉망이어서 그렇지 교사들은 세계 최고의 역량을 갖고 있다고), 두고두고 민망해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곤 했는데 몇 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빈소에서 마침내 나는 괜히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런 얘기는 몇 건이라도 더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꾸 한다고 좋을 것도 없다. 어쨌든 죽어 가면 모든 것이 쓸쓸하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는 생각만 골똘해지는 것이다.

그들에게 「제망매가」를 읊어주어도 좋을 것 같다.

사연은 이렇다.

 

 

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2일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해서 꽃 뿌리는 공덕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朝元殿)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임금이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 있는 중을 기다렸다. 그때 월명사(月明師)가 밭둑으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짓게 했다.

(중략)

월명은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서 재를 올릴 때 향가를 지어 제사 지냈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려 없어졌다.

향가는 이렇다.

 

생사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彌陀刹, 극락세계)에서 너를 만나볼 나는

도를 닦아 기다리련다

 

월명은 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의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는 것을 멈추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길을 월명리라 했다. 월명사도 또한 이로써 이름이 났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였다.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함은 오래되었는데 대개 시송(詩頌)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주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린다.

 

바람은 종이돈을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는 밝은 달을 흔들어 항아(姮娥, 달 속에 있다는 선녀)가 발을 멈추었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라

만덕화(萬德花, 부처의 가슴 위에 있는 卍은 萬德을 표시함) 한 곡조로 즐겨 맞았다.

 

                                                                   일연 《삼국유사 2》(이재호 옮김, 솔출판사 1997. 35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