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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순영 동시집《열 살짜리 벽지》

by 답설재 2020. 3. 28.

김순영 동시집 《열 살짜리 벽지》

소야주니어 2020

 

 

 

 

 

 

 

1

 

동시집을 보면(1960년대 초였지? 교과서 전성시대, 내가 생전에 동시집 같은 걸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생각난다.

 

나중에 교육부 편수관이 되어 교과서를 만들고 심사하고 관리할 때는 괜히 옆자리의 국어 편수관들을 미워했다. '꼴에 국어 편수관이라고?' 내가 국어 교과를 맡지 못하고 다른 교과를 맡아서 약이 올랐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 같으면 이 시를 교과서에 실을 텐데…….'

 

 

꽃 식당

 

 

봄이 차린

향긋한 식당

꽃잎 간판 내걸었다

 

풀밭에 민들레 식당

담장 높이 목련 식당

큰길 옆 개나리 식당.

 

꽃 식당마다

손님 끌기 한창

'꿀'

'꽃가루'

차림표 붙여 놓고

 

벌 나비가 종일 들락날락

차려 내는 솜씨도

인심도 좋은 모양이다.

 

 

이 시를 본 아이들은 밖으로 뛰쳐나가 민들레 식당, 목련 식당, 개나리 식당을 차려보고 싶겠지? "좋아! 그럼 그렇게 해봐!" 녀석들은 나를 멋진 선생님이라고 하겠지? 나를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없겠지?

 

 

2

 

박두순 시인은 발문 제목을 '이 동시집을 읽는 어린이와 어른에게'라고 했다.

이런 시를 보고 그 제목을 붙였을까?

 

 

도시 흙

 

 

숨구멍 없는

보도 블록, 아스팔트 밑에서도

 

조그만 싹을

밀어

올리며

땅을 지킨다.

 

이름은

흙이니까.

 

 

힘이 센 사람들에게 이 시를 보여주고 싶다. 좀 달라지겠지? 약한 사람, 불쌍한 사람, 불행한 사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는, 가엽게 여기는, 보살펴주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도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인간이 되겠지?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꼴 같지 않은, 더러운 인간이 되려는 마음을 누를 수도 있겠지?

아, 힘이 도통 없는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부디 힘내세요! 다 괜찮을 거예요! 퐛팅!!!"

 

 

3

 

예쁜 책이다.

읽고 버린 책이 갖고 있는 책보다 더 많은, 책이라면 '상처뿐이지만'(이렇게 쓰니까 우습네?) 이 동시집은 버리지 않겠다. '총천연색', 한 편 한 편 아이들이 그린 그림과 함께 엮여서, 몰라보게 바뀌어버린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같다. 그게 아니지, 국어 교과서를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 김순영 시인과 아이들에게 부탁하면 잘 만들어주겠지?

 

'김순영 동시집'.

'김순영'.

이름이 시 같은 김순영 시인은 어떤 분일까?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시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케이크나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식당에서는 어떤 음식을 시키는지, 주머니나 가방엔 뭘 넣어가지고 다니는지, 자기네들끼리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는지, 장난을 치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지, 평소엔 뭘 하고 지내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진다.

 

 

4

 

나더러 낭독하고 싶은 부분을 고르라면 제1부 새싹의 공부, 제2부 길 잃은 거짓말, 제3부 마음 감추려고, 제4부 아빠가 되려면 중에서 제4부를 맡겠다.

제4부에는 낭독하고 싶은 동시가 '너무' 많다.

그러지 말고 그중에서 딱 한 편만 고르라면? '열 살짜리 벽지'? '바코드'? '화난 형'? 아니, '말이 짧아진다'?

 

 

말이 짧아진다

 

 

아빠가 하늘나라로 간

5월만 되면

엄마는

말이 짧아진다.

 

운동회 날 내가 바람처럼 달리는 걸

엄마가 봤는데도

"잘했네"

짧은 칭찬만.

 

내가 처음으로

계란후라이 성공했는데도

"애썼네"

짧은 칭찬만.

 

아빠 하늘나라로 간

5월만 되면

엄마는

말이 짧아진다.

 

 

나는, 나 같으면, 이 시를 낭독한 다음에 이런 해설을 해주고 싶다. "아이들은(도) 다 알아요. 가슴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가슴이 아프다고 얘기하고 위로를 받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는 우리를 위로해줄 힘이 있거든요. (어쩌고저쩌고.)"

 

 

5

 

박두순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스물여덟 페이지나 썼다. '이 동시집을 읽는 어린이와 어른에게'.

나는 부럽다.

김순영 시인도 부럽고 박두순 시인도 부럽다.

나더러 국회의원 할래, 박두순 시인 할래 물으면 나는 얼른 "박두순!!!" 할 것 같다. 그러면 김순영 시인 같은 분이 내게 이렇게 부탁하겠지?

"파란편지님, 시집을 내게 되었어요. 발문 좀 써주세요. 길이요? '마음대로'요. 발문이라고 구태여 짧게 쓰실 건 없어요. 스물여덟 페이지쯤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