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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이기철 「꽃나무 아래 책보를 깔아주었다」

by 답설재 2020. 4. 9.

꽃나무 아래 책보를 깔아주었다

 

 

이기철

 

 

 

겨울 창고 문고리를 따면 가득한 봄이 쏟아져 나온다

냉이꽃 주소 한 장 들고 꽃동네를 찾아간다

 

오전의 뺨에 연지를 찍어주고 싶던 시간과 꿈꾸는 딸기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싶던 날들을 데리고 간다

단추처럼 만지던 모음의 헌사들과 지나고 나면 허언이 되고 말 낙화와의 언약도 담아서 간다

 

그에게 치마 한 벌 바느질해 입히고 홀로 황홀했던 봄날과

홈질도 박음질도 서툰 내 반짇고리에 날아와 담기는 꽃잎의 말도 보듬고 간다

 

저 분홍들에게 눈 맞추는 일밖엔, 체온 밴 내복을 빨아 너는 일밖엔

내가 할 일은 없어, 하루만 더 머물다 가라는 말밖엔 전할 안부는 없어

 

다시 올 삼백예순 날 기다려 나는 피부가 하얀 꽃나무 아래

헌사 대신 꺠끗한 책보를 깔아주었다

 

 

 

――――――――――――――――――――――――――――――

이기철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열하를 향하여』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웠다』 『가장 따뜻한 책』 『나무, 나의 모국어』 『꽃들의 화장 시간』 『흰 꽃 만지는 시간』 『산산수수화화초초』 등. 〈김수영문학상〉 〈시와 시학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20년 3월호 110~111.

 

 

 

 

 

 

 

속절없이 지나가는 봄날, 나이 지긋한 시인의 서정시

 

 

* 덧붙임 *

 

이 시를 여기에 필사해 놓고 '혼자서' 바라보고 있는데 독자 한 분이 이 시와 시인에 대해 썼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010년에 그러니까 꼭 10년 전에 "현대문학"에서
대필代筆'이라는 시를 보고
큰 느낌을 받고
이 블로그에 실었었는데
겸연쩍게도 아무도 댓글을 달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시에는

 

燕巖의 <열하일기> 상권을 읽으며 그 뇌우 같은 목청을 견디지 못해
이렇듯 산문시 한 편으로 마음 대신함에 가편 있으시길. 경인년 각북 우거 난필.

 

이런 각주가 붙어 있었는데,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소감을 이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시인이 이 블로그에 올 리는 없지만
혹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참 미안할 일이 아닌가 싶었고,
이번에는 아예 댓들란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 독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