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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375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의 詩에 몰두한 적이 있다. 그의 네 번째 시집 『處容 以後』(민음사, 1982)의 표지에는 시인의 얼굴 그림이 있다. 안경을 낀 깡마른 얼굴을 스케치해 준 그 화가는 나중에 자신의 소묘집 『시인의 초상』(지혜네, 1998)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김춘수 선생은 성격 면에서 매우 찬 분이다. 성격이 더운 시인도 있고, 괄괄한 분도 있고, 오종종한 서생(書生)도 있는데, 늘 수면에 얼음 같은 게 떠 있는 분이 선생이다." "김춘수 선생이 어느 하늘 아래(옛날에 바닷가 마산이나, 뜰에 후박나무가 서 있던 대구 만촌동이나, 지금 서울 강남 아파트촌에) 계시다는 것은 마음 훈훈하다." 그러고보면 김춘수의 시에는 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차가움 안에 따듯한 마음, 섬세함이 스며 있다. 샤갈의 .. 2020. 9. 25.
황병승 「가려워진 등짝」 가려워진 등짝 황병승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다 작년 이맘때는 실연失戀을 했는데 비 내리는 우체국 계단에서 사랑스런 내 강아지 짜부가 위로해주었지 '괜찮아 울지 마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짜부는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도 뛰어내려갔지 나는 골치가 아프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짜부야 짜부야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엄마가 그랬을 텐데!' 소리치기도 귀찮아서 하늘이 절로 무너져내렸으면 하고 바랐지 작년 이맘때에는 짜부도 나도 기진맥진한 얼굴로 시골집에 불쑥 찾아가 삶은 옥수수를 먹기도 했지 채마밭에 앉아 병색이 짙은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아직은 안 죽어' 배시시 웃다가 검은 옥수수 알갱이를 발등에 흘렸었는데 어느덧 오월, 아름답고 좋은 날이 또다시 와서 지나간 날들이 우습고 간지러.. 2020. 9. 24.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1-소노 아야코의 계로록(戒老錄)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 소노 아야코의 계로록(戒老錄) 오경순 옮김, 리수 2004 이런 것들은 어떤 기준에서 열거된 것일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령, 젊은이가(혹은 젊은 시절에) 보기에 좋지 않다고 지적하고 싶은 노인의 행태, 혹은 젊은이들이 나중에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를 가정하며 떠올려본 것들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전에는 이런 것들을, 실력이 없어서 걸핏하면 이런 건 외워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런 걸 시험에 내는 교수의 시험 출제 예상 문제를 암기해두듯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으니까, 그게 불가능하니까 기억하려들지 않고 그저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게 되었습니다. 1. 엄중한 자기구제 *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 2020. 9. 10.
정은호 「에른스트의 여행」 에른스트의 여행 정은호 “당분간은 이 비에 젖을 수밖엔 없겠네.” 발코니에서 에른스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더니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뇨, 근데 배 안 고파요." 그가 젖은 채로 발코니에 서서 대답했다. "나가서 밥 먹고 올게요." 나는 우산을 챙겨 외출했다. 로비를 나오니 날씨가 화창했다. 식당에 들어가 백반을 먹고 나오는 길에 우비 입은 사람을 봤다. 에른스트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잠시 그와 나 사이로 트럭이 지나갔고, 그는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에른스트는 없었다. 한낮이었다. 나는 병원에 가야 했다. 병원 가는 길에 또 우비 입은 사람을 봤다. 얼굴을 확인하려다 귀찮아져 그냥 지나쳤다. 의사 선생님에게 .. 2020. 9. 8.
황인숙「철 지난 바닷가」 철 지난 바닷가 황인숙 나도 일요일을 사랑했었죠 바캉스를 아주아주 사랑했었죠 당신 나이에는 그랬더랬죠 그런데 이제 휴일이 별나지도 대수롭지도 않아요 이제 조용한 바다가 좋아요 사방에서 날아온 나뭇잎들이 좌충우돌하다 매미 떼를 따라 휩쓸려 갈 태풍 지난 뒤에나 바다에 가보겠어요 일요일들과 바캉스들을 가라앉힌 바닷가를 찰방찰방 거닐어보겠어요 발가락 새로 바닷물과 모래가 들락거리겠죠 하늘에선 햇빛이 들락거렸으면 좋겠어요 흰 구름 뭉게뭉게 피어올랐으면 좋겠어요 구름의 반그림자 속에서 당신과 만날 수도 있겠죠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레진 얘기를 하니 내 슬픈 금니가 떠오른다. 그 옛날에 내 칫솔질을 목격한 친구가 말했었다. "아주 이빨을 폭파시켜라!" 내 칫솔질은 좀 과격한 편이다.. 2020. 8. 23.
리호 《기타와 바게트》 리호 시집 《기타와 바게트》 문학수첩 2020 묵향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나는 돈키호테, 잡을 수 없다고 하는 저 하늘의 별을 잡는 적도의 펭귄 0 벼루에서 부화시킨 난에 하얀 꽃이 피었다 마모된 자리를 찾아 B플랫 음으로 채웠다 제 몸 갈아 스민 물에서 서서히 목소리가 자랐다 노송을 머리에 꽂고 온 사향노루가 어제와 똑같은 크기의 농도를 껴입고 불씨를 건네는 새벽 그늘을 먹고 소리 없이 알을 낳는 스킨다비스 줄기 끝에 햇빛의 발걸음이 멈춘 그 시각 무장해제 된 상태로 소파에 누운 평각의 그녀가 봉황의 눈을 깨트리며 날았다 익숙한 무채색으로 난을 치듯 아침을 그렸다 향 끝에 끌어당긴 빛으로 불을 놓으면 곱게 두루마기 걸치.. 2020. 8. 7.
박남원 「그 여자」 그 여자 ​ 맑은 가을 일요일,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여학교 교정을 바라보다가 교실 안 여학생 하나가 렌즈 안으로 슬쩍 들어왔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을 맞아 빈 교실에 공부를 하러 온 모양. 학생은 책을 읽고 있다. 잠시 후 책을 읽으며 머리칼을 슬쩍 뒤로 젖히기도 한다. 그러다간 이번엔 일어서서 멀리 창문 밖을 바라다본다. 그렇게 바로 코앞에 있는 듯. 태연히 시간이 흐르고, 세상엔 이제 그녀와 나, 단 둘 뿐이다. 그러게, 세월이 참 빠르긴 빠르다. 벌써, 이십 몇 년 그 여자 지금쯤 어디로 시집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고는 있는지.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세상살이》(시집 「캄캄한 지상」문학과경계사 2005 절판)에서. 시인이 나를 아나? 나를 보고 시를 썼나? 말이 안 되지? 누군들 그리움이 없.. 2020. 7. 23.
김원길 《적막행寂寞行》 김원길 시집 《적막행寂寞行》 청어 2020 시인과 함께하던 그 저녁들로부터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허접하고 시인은 변함 없습니다. 여든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이 이런 것이구나,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빛깔은 이십대 중반의 시인이 보여주던 적막이었습니다. 서정(抒情)의 강물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情)이 아니었습니다. "자, 또 한 편 써볼까?" 하고 술술 써내려갔을 듯한, 낯간지러운 '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마법 그리운 율리아나, 어이 할거나.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여인의 사랑만이 사슬을 푼다는 별난 마법에 걸려 괴물의 몸으로 빈 성에 숨어 사는 이야기 속 딱한 왕자. 율리아나, 그대 또한 멀리 외져 발길 없는 숲속 궁전, 백 년을 옴짝 않고 누워 잠자.. 2020. 6. 28.
김행숙 「마지막 여관」 마지막 여관 김행숙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 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신은 기껏해야 작은 여관의 문지기일 뿐인데, 세계의 주인장처럼 당신의 말은 몇 겹의 메아리를 두르고 파문처럼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동심원 가운데 서 있으면 나도 나를 쫓아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겨울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무꾼 이야기 같은 게 자꾸 생각나고,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까? 왜 그런 이야기만 기억날까? 왜 그런 이야기에 도시빈민 출신의 내가 나오는 것일까? 깊은 산속에서 나는 간신히 여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여.. 2020. 6. 20.
강성은 「스노볼」 스노볼 강성은 엄마 눈이 내려요 자꾸자꾸 내려요 매일매일 내려요 눈 쌓인 소나무 가지 위에 까마귀가 나무 아래 호랑나비와 장난 치는 고양이가 그대로 멈춰 있어요 누가 이곳에 온다면 차를 대접할 텐데 아무도 오지 않고 가끔 누가 우릴 엿보는 것 같아요 흰 눈 덮인 마을에 불을 지를까요 마을이 다 타버리기 전에 누가 달려와 불을 꺼줄지도 몰라요 겨울은 생각이 많은 시간이에요 생각이 저 눈을 내리게 해요 생각이 우릴 눈 속에 가두었어요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아무도 우릴 만나지 못할 거예요 여긴 어떤 슬픈 사람의 마음속인가요 ――――――――――――――――――――――――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단지 조금 이상한』. 아이들이 저승에 가서도.. 2020. 6. 11.
월명 「제망매가」 「제망매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 이야기하면 혹 누이동생들에게 재수 없는 일이나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생사의 길'이 재수에 달린 것일까. 내 마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지막 고개를 넘은 느낌이었다. 얽히고설키어 살던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니까 당장 하얗게 잊혔고 함께하던 시간들 중 몇 가지가 쓸쓸한 날에만 두어 장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H 씨는 가난한 초등교사였다가 공부를 더 하고 노력해서 저명한 교수가 되었고 매우 넓은 토지도 소유했으나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다. 죽기 직전 몇 번이나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괜히 애를 썼다고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약값이 많이 든다고 가슴 아파했고, 돌아갈 때 작은 물건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 2020. 6. 5.
이신율리 「콜록콜록 사월」 콜록콜록 사월 이신율리 배꽃이 질 때까지 나는, 사월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날씨가 변덕스럽다고 발이 작은 운동화는 팔지 않았다 참외에서 망고 냄새가 났다 사월이 콜록거렸다 푸른 것은 더 푸른 것끼리 속아 넘어가고 흰 것은 흰 것끼리 모였다 배꽃 같은 나이를 뒤적거렸다 달아나지 않으려고 네 칸짜리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하루가 갔다 하늘은 내일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배꽃의 잔소리가 4차선 도로까지 따라왔다 노래하나 물고 새가 날아갔다 잃어버린 가사가 둥둥 떠다녔다 손을 흔들어도 버스는 지나갔다 초록 티셔츠를 입은 울창한 숲이 아무도 모르게 헛발질을 했다 떫고 신 것들이 툭툭 나이만큼 떨어졌다 열다섯 살에 잠갔던 배꽃이 먼 쪽에서부터 피기 시작했다 구름 뒤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는 숲을 찾고 있었다 .. 2020. 5. 12.